나의 글쓰기 도구 변천사

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나, 마침내 찾아낸, 컴퓨터가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

나의 글쓰기 도구 변천사

그간 생각을 정리하려고 꾸준히 노력했다. 갑자기 떠오른 아이디어, 새롭게 배운 지식, 책에서 본 마음에 드는 구절, 이것 저것에 대한 잡생각 등 마음만 먹으면 쓸 거리는 넘쳐난다. 자발적으로 작성하는 문서는 모두 미래의 나를 위한 것이다. 그냥 보관하는 것이든 블로그에 공개하는 것이든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보다는 내가 잊지 않으려고 정리하는 것이다. 그동안 글을 쓰는 데 여러 도구를 사용했다. 어떤 도구를 거쳐 지금에 이르렀는지 정리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종이

처음에는 공책에 정리했다. 종이에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려 기록하는 것은 굉장이 큰 장점이 있다. 생각을 자유 자재로 표현할 수 있고 비교적 빠르게 기록할 수 있다. 그러나 종이에 기록한 내용은 많지 않고 일기를 제외하면 남아 있는 것도 없다. 글씨도 예쁘게 못 쓰고 정리하는 능력도 부족한데 잘 하고 싶은 욕심만 컸다. 새 공책에 정리를 시작하면 보기 좋게 만드는 데 너무 신경을 쓰다가 지쳐 결국 몇 장밖에 채우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시간이 지나면 쓰던 공책을 버리고 새 공책에서 새 마음으로 시작하지만 역시 오래 가지 못했다.

이런 문제 외에도 몇 가지 문제가 더 있다. 손으로 글씨를 쓰는 것은 자판으로 입력하는 것보다 속도가 느리다. 잘못 썼을 때 수정하는 것도 쉽지 않다. 부피가 커 보관도 힘들다.

HTML

컴퓨터에 익숙해진 후에는 컴퓨터를 이용해 정리하시 시작했다. 텍스트 파일도 시도해봤지만 원하는 부분을 강조할 수도 없고 그림을 표현할 수도 없었다. 잠깐 시도해보고 그만 두었다. 갑자기 웹이 뜨는 것을 보고 HTML을 둘러보니 HTML로 정리하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HTML은 기본적인 서식을 지정할 수 있고 그림도 넣을 수 있었다.

텍스트 에디터에서 HTML 태그를 하나하나 입력한 다음 브라우저에 표시하고는 흐뭇해하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태그를 직업 입력하는 것은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생각을 정리하기 보다는 HTML 태그를 조작하고 브라우저에서 어떻게 보이는지 확인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썼던 것 같다.

HTML 에디터는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HTML 에디터로 작성한 문서는 태그 구조가 지나치게 복잡해 도저히 봐줄 수가 없었다. 결국 생각을 정리하기 보다는 에디터가 만들어낸 불필요한 태그를 정리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썼다. 글쓰기에 좋은 도구라 할 수 없었다.

MS 오피스

언제부터인지 회사 문서뿐 아니라 개인 문서를 작성했 때도 MS 오피스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큰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멋지게 보이는 문서를 만들 수 있었다. 글을 많이 써야 하는 경우에는 워드로 작업했고, 다이어그램이 필요한 경우에는 PPT를 사용했고, 숫자 계산이 필요한 경우에는 엑셀을 활용했다. 책을 쓸 때도, 번역을 할 때도 모두 워드로 작업했다. 완벽한 조합이었고 다른 방식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런데 MS 오피스가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MS 오피스로 작성한 문서는 파일에 저장된다. 나중에 원하는 문서를 쉽게 찾으려면 파일 이름을 잘 지어 디렉터리별로 잘 분류해야 하는데, 제대로 관리하기가 쉽지 않았다. 백업 몇번 하고 나면 어떤 게 원본인지 분간이 안 된다. 회사와 집에서 왔다갔다 하며 작업하기 위해 USB에 저장해 가지고 다녀야 했다. 그러나 USB를 분실하거나 USB가 깨지는 경우를 대비해 백업을 철저히 해야 했다. 정신줄을 놓고 있다 보면 일부 작업을 원본에 하고 일부 작업은 복사본에 하는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하기도 한다. 그러면 파일 내용을 일일히 확인해 내용을 병합해야 했다.

버전관리도 골치아픈 문제였다. 파일 이름 뒤에 날짜를 붙여가며 버전을 만들기는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예전 버전을 보관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머리가 아팠다. 버전간 차이점을 보기도 어려웠다. 워드의 검토 기능은 훌륭했지만, 공동 작업을 가능하게 하는 정도에 그쳤지 공동 작업을 편하게 해주지는 못했다. 메일로 파일을 주고 받으며 코멘트를 남기고 교정 내용을 병합하는 작업을 할 때면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구글 독스

MS 오피스에 조금씩 불만이 쌓여갈 때쯤 구글 독스를 접하게 되었다. 기능이 MS 워드만큼 풍부하지는 않았지만 그동안 MS 오피스를 사용하며 느꼈던 불편을 대부분 해소해 주었다. 파일 관리를 내가 하지 않아도 되고, 인터넷이 가능하면 언제 어디서든 문서를 열어 편집할 수 있었다. 버전 관리도 자동으로 되었다. 공유와 협업도 쉬웠다. URL과 권한설정만 하면 문서를 읽기전용 또는 읽기쓰기 모드로 공유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MS 오피스와 기능을 비교하며 구글 독스의 단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MS 오피스의 풍부한 기능은 생각을 정리할 때는 오히려 방해가 되었다. 접근성, 공유, 협업, 버전관리, 검색... MS 오피스를 사용하면서 아쉬웠던 모든 문제가 한 방에 해결되었다.

물론 완벽하지는 않았다. 표 편집 기능이 부족해 표를 내 마음대로 편집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 나는 표를 많이 사용하지 않아, 표 때문에 문제가 된 경우는 한두 번 뿐이었다. 지금은 표 편집도 예전에 비해 훨씬 좋아졌다.

모든 문서를 구글 독스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에게 보낼 때는 PDF로 저장해 전달했다. 공동 작업자와는 공동 편집을 할 수 있었다. 검토자에게는 읽기 권한만 열어 URL을 보내주면 됐다. 컴퓨터를 바꿀 때 백업에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아무리 오래된 문서라도 잃어버릴 염려가 없었다. 복잡한 다이어그램을 그려야 할 때는 여전히 PPT를 사용했지만,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MS 워드를 사용하는 일을 거의 없었다.

구글 독스는 거의 완벽했지만 두 가지 불만이 있었다. 첫째, 코드 편집이 불편했다. 직업이 프로그래머다 보니 글을 쓸 때 코드 블록을 포함시키는 경우가 잦은데 구글 독스(MS 워드도 마찬가지)에서는 소스 코드를 편집하기가 불편했다. 그래서 보통 IDE에서 코드를 편집한 다음 복사해 붙여 넣곤 했는데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었다. 코드를 넣을 일이 생기면 코드 포매팅 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내곤 했다. 둘째, 수식 편집이 불편했다. 구글 독스의 수식편집 기능은 구색을 맞추는 정도일 뿐이다. 수식 입력도 불편하고 수식이 예쁘게 표시되지도 않는다. MS 워드에서는 수식이 조금 낫게 표현되만 수식 편집이 번거로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Emacs

구글 독스를 사용하다가 다시 로컬 머신에 파일을 저장하는 텍스트 에디터를 쓰게 된 것은 내가 생각해도 의외다. 난데없이 Emacs라니... 글쓰기 도구로 Emacs를 사용하게 된 데는 여러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맥북, 마크다운, GitHub, 정적 사이트 생성기... 아마 이 중 하나라도 빠졌다면 글쓰기 도구로 Emacs를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맥북을 사용하면서 PC나 다른 노트북은 거들떠 보지도 않게 되었다. 모든 작업을 맥북에서만 하니 파일을 맥북에 저장해 놓는다고 해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게다가 문서를 마크다운 형식으로 작성하면 소스 코드 하이라이팅이나 수식 삽입도 쉽다. Emacs의 mmm-mode를 사용하면 마크다운 문서를 작성하면서도 코드나 수식을 쉽게 편집할 수 있다. 이렇게 만든 마크다운 문서는 결국 텍스트 파일이기 때문에 Git과 같은 버전관리 도구로 쉽게 버전관리를 할 수 있다. GitHub에 올려놓으면 접근성, 공유, 협업, 버전관리, 검색 문제가 다 해결된다. 모든 파일의 복사본이 내 맥북에 있어 쉽게 편집할 수 있다. 블로그에 글을 쓸 때도 마크다운으로 작성한 다음 정적 사이트 생성기로 블로그를 생성해 GitHub에 올린다.

마크다운으로 문서를 작성할 때 가장 좋은 점은 글쓰기에 집중할 수 있다는 점이다. 워드나 구글 독스 같은 위지윅(WYSWYG) 에디터를 사용할 때는 자꾸 서식에 신경을 쓰게 되어 글쓰기 흐름이 끊긴다. 서식을 지정하려고 마우스와 키보다를 왔다갔다 하면서 글쓰기가 수시로 중단된다. 마크다운으로 문서를 작성하면 그저 열심히 텍스트만 입력할 수 있다.

생각을 정리할 때는 org-mode를 사용하기도 한다. org-mode를 사용하면 목록 또는 트리 형태로 생각을 정리할 때 매우 편하다.

결론

종이부터 시작해 텍스트 에디터, HTML, MS 오피스, 구글 독스를 거친 긴 여정은 Emacs에 안착하며 마무리 되었다. Emacs를 쓰고 난 다음부터 글을 훨씬 많이 쓰게 되었다. 미래에 어떤 도구가 나올지 모르지만 당분간은 Emacs를 사용할 것 같다. Emacs는 코딩에도 좋은 에디터일뿐 아니라 글쓰기에도 좋은 에디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