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나, 마침내 찾아낸, 컴퓨터가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

이사

지난 주, 워킹(Woking)에서 서튼(Sutton)으로 이사했다. 워킹은 살기 좋은 곳이지만, 학교가 별로 좋지 않았다. 서튼으로 가면 출퇴근은 불편해지지만 좋은 학교가 많다. 아이들을 위해서는 서튼이 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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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갈 집을 계약하고 이사 업체를 알아봤다. 지인에게 물어보니 애니밴이란 웹사이트를 알려주었다. 이사 관련된 정보를 입력하면 이사 업체가 가격을 입찰하는 역경매 방식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웹사이트였다.

우리 집에는 짐이 많다. 한국에서 가져 온 온갖 세간에 아이들 책까지... 가격을 너무 적게 제시한 업체는 이런 사정을 모를 것이다. 사실 어느 정도가 적절한 가격인지 모른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던 것 같다. 몇 개 업체를 선택해 전화를 했는데 대부분 연결이 안 되었고, Simply Removal이란 업체와 겨우 통화할 수 있었다.

업체의 질문에 간단히 답한 후, 피아노, 책장, 냉장고 등 부피가 크고 무거운 것들을 중심으로 이야기했다. 책이 많다는 것도 강조했다. 방문 조사 없이 견적을 낸다는 것이 불안했지만, 상담원은 자기네 회사가 영국의 수 많은 집을 이사한 경험이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생각해보고 며칠 후에 연락을 줘도 괜찮다고 했다.

다른 이사 업체도 연락이 되었다. 이 업체는 집을 방문해 확인한 다음 견적을 준다고 했다. 조사원이 집에 와서 옮길 짐을 직접 확인하고, 트럭을 주차할 공간까지 꼼꼼이 확인하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가격이 문제였다. Simply Removal보다 거의 두 배나 비쌌다.

견적을 받고 며칠 후 전화가 와서 어떡할거냐 묻길래 너무 비싸다고 했더니 그쪽도 수긍하는 눈치였다. Simply Removal로 이사하기로 결정하고 전화해서 계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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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이사 업체는 이사와 포장을 별도 서비스로 취급한다. 애니밴에서 본 업체들이 가격이 저렴했던 것은 포장이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이사할 짐을 모두 포장해 옮길 준비를 해두면 이사 업체는 짐을 이사할 곳으로 옮겨 주기만 하는 것이다.

직접 모든 짐을 싸는 것은 쉽지 않을 것 같아 포장 서비스도 함께 계약했는데, 계약 내용을 자세히 보니 포장은 40박스까지만 되고 40박스를 초과하면 상자당 거의 10파운드 가까이 추가 비용이 발생한다는 항목이 있었다.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직접 포장하기 어려운 것만 업체에 맡기고 책 같은 것은 내가 직접 싸면 될 것이다.

짐을 싸려면 박스가 필요하다. 아마존에서 찾아보니 박스 가격이 생각보다 비쌌다. 모리슨에서 이사용 박스를 구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모리슨에 가서 물어봤더니 이젠 박스를 주지 않는다고 했다. 괜히 시간만 낭비했다. 다시 아마존에 가서 주문하려 했더니 배송 기간이 문제였다. 그나마 잠시 고민하는 사이에 다 팔려버려 주문할 수 없었다.

급하게 다른 업체를 찾아 주문했다. 기간이 촉박해 빠른 배송을 선택했더니 배송비만 20파운드가 넘는다. 박스 30파운드에 배송비가 20파운드라니... 미리미리 준비했어야 하는데... 후회가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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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의 주 목적이 학교인 만큼 아이들 학교를 빨리 알아봐야 했다. 영국에서는 만 3살이 지나면 Nursery에 갈 수 있는데, 한국으로 치면 어린이집과 비슷한 것 같다. 초등학교에서 운영하고 주당 15시간까지 국가에서 지원한다. 평일 하루 3시간까지는 비용이 들지 않지만 그 이상 아이를 맡기려면 추가 비용을 내야 한다.

둘째 아이는 올해 9월부터 Nursery에 갈 수 있다. 바로 집 앞에 있는 학교에 알아봤더니 다행히 자리가 있다고 한다. 지원서를 작성해 학교에 제출했다. 학교 사무실에 있는 선생님이 다음 날 학교 끝나면 방학이라 바쁘다고 하면서도 친절하게 도와주었다. 방학 기간 동안에는 학교 문을 열지 않는다. 조금 늦었으면 큰일 날 뻔 했다.

첫째 아이는 전학 지원을 해야 했는데 이건 카운슬을 통해 지원해야 했다. 전화해 물어보니 이사한 후에 지원할 수 있다고 한다. 지원서에는 아이가 실제 거주하는 주소를 기입해야 하고, 부모와 따로 살 경우에는 사유를 함께 제출하도록 되어 있었다. 주소를 속인 것이 발각되면 벌금은 물론 고발될 수 있고 아이 입학은 취소된다는 살벌한 문구가 적혀 있었다.

실제 이사날은 방학 시작 후라 계약 시작일에 지원서를 보냈다. 며칠 후 우편으로 답장이 왔다. 모든 학교가 방학을 시작해 학교에 빈 자리가 있는지 확인할 수 없다, 지원한 학교 대기자 명단에 올려 놓았다, 개학 후 학교와 연락되면 다시 알려주겠다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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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장 서비스를 신청했더니 이사 전날 오후에 와서 이사짐을 포장한다고 한다. 이사 당일 빠르게 이동할 수 있게 하려는 의도인 것 같다. 그런데, 포장 팀이 오후 3시~6시 사이 도착하기로 되어 있는데 5시가 넘도록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업체에 계속 전화를 걸어 닥달했다.

마침내 팀이 도착했다. 거의 저녁 8시가 된 시각이었다. 덩치가 큰 근육질 아저씨 한 명과 곱상하게 생긴 총각 한 명이 왔다. 근육질 아저씨는 자기 이름을 크리스티안이라 했다. 연신 웃으며 말했지만 인상이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았다. 영국 사람이 아닌 것 같아 물어봤더니 루마니아에서 왔다고 했다.

박스에 물건을 담는 모습을 보니 내가 볼 때는 박스를 가닥 채우고 내가 안 볼때는 박스를 반도 안 채우는 것 같았다. 박스에 물건을 너무 많이 넣으면 무거워져서 들기 힘들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어쨌든 40박스까지 채우고 나머지는 내가 직접 채우면 될 테니 문제될 것 없다고 생각했다.

역시나 40박스를 다 채우고 나서 더 채우려면 추가 비용을 내야 한다고 말한다. 박스를 설렁설렁 채우는 것을 봤을 때 이럴 줄 알았다. 됐다고, 나머지는 내가 직접 포장하겠다고 답했다. 남은 짐은 주로 책으로 나 혼자서도 충분히 포장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포장이 끝난 후 바깥까지 함께 나갔다. 가져온 트럭을 보니 우리집 세간을 모두 담기에는 작아 보여 더 큰 차가 필요하다고 했더니, 다 안 들어가면 두번 왔다갔다 하면 된다고, 괜찮다고 답한다. 추가 비용은 없다고 했다. 시간은 더 들겠지만 큰 문제는 아니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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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도 늦게 도착하더니 이사 날도 늦게 도착했다. 전날보다 한 명이 더 왔다. 짐을 나르기 시작했다. 복도가 기니 카트를 가져오면 좋겠다고 얘기했지만 가져오지 않았다. 나중에 피아노 어떻게 옮기려고 하는지... 알아서 잘 옮기겠지 생각했다. 아이가 일 하는 데 방해되는 것 같아 아내에게 아이와 함께 도서관이나 카페에 가 있게 했다.

처음에는 열심히 일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크리스티안에게 전화가 왔다. 잠시 어디 좀 다녀와야 겠다고 한다. 그러라고 했다. 또 전화가 오더니 차를 빼야 한다고 한다. 그러라고 했다. 그런데 한 시간이 지나도록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이상하게 생각되어 내려가 봤다. 트럭은 주차되어 있는데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봤더니 건물 앞 잔디밭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 인간들이... 점심 먹을 거면 얘기를 하고 먹지. 나는 밥도 못 먹고 기다리고 있는데' 화가 났지만 참았다. 힘든 일 하는데 밥은 먹어가면서 해야지 생각했다. 사라진 지 한 시간도 지나서 돌아온 것 같다. 다시 일을 시작하긴 했는데 어찌나 느릿느릿 하는지...

크리스티안이 어제 말했던 것과는 달리, 두 번 왔다갔다 하려면 추가로 150 파운드를 더 내라고 한다. 회사에 연락하는 것 보다 자기들에게 현금으로 직접 주는 게 싸다고 하면서. 짜증이 치밀었지만 오늘 안으로 이사를 끝내고 싶어 그러자고 했다. 그런데 내가 아내와 통화하는 걸 보고는 다짜고짜 화를 내기 시작했다. 회사에 전화했냐고, 너를 신뢰할 수 없다고, 목록에 있는 것만 배달할 테니 나머지는 알아서 하라고 말했다.

어이가 없었지만 그땐 오늘 안으로 이사를 끝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좋은 말로 잘 어르고 달랬다. 결국 오후 4시가 다 돼서야 짐 싣기가 끝났다. 집 안에 아직 짐이 많이 남아 있고, 건물 1층 현관에 내놓은 박스도 차에 다 싣지 못했다. 건물 입구에 이렇게 상자를 놔둬도 괜찮겠냐고 했더니 괜찮을 거라 한다. 빨리 다시 와서 정리하면 되겠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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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집으로 이사가 짐을 내리기 시작했다. 새 집은 2층인데 1층은 마루도 되어 있고 2층은 카펫이 깔려 있다. 집 주인이 카펫이 더러워지지 않도록 주의해 달라고 당부했기에 2층에 올라갈 때는 신발을 벗어달라고 부탁했더니 마구 짜증을 냈다. 식탁은 1층 리셉션으로 넣어달라고 했더니 입구가 좁아 힘들다고 짜증을 냈다.

피아노를 옮길 때는 세 명이 달라붙었다. 집 복도가 좁아 앞으로는 피아노가 통과할 수 없었다. 결국 뒷 문을 통해 피아노를 옮겨야 했다. 피아노를 직접 들고 옮기려 하기에 트럭을 뒷마당 쪽으로 옮기면 이동거리가 짧아질 거라 알려줬다.

안타깝게도 뒷마당으로 들어가는 길은 폭이 좁아 트럭을 충분히 가까이 댈 수 없었다. 그래도 피아노를 들고 이동할 거리는 많이 줄어들었다. 세 명이 피아노를 번적 들어 옮기기 시작했다. 피아노는 정말 무겁기 때문에 옮기는 데 힘이 많이 들었고 시간도 많이 걸렸다. 쯧쯧, 그러게 트롤리를 가져오고 했잖아.

다시 원래 집에 가서 남은 짐을 싣고 와야 했기에 좋게 구슬려서 짐을 다 내렸다. 마침내 짐을 다 내리고 남은 짐을 가지러 가자 했더니 갑자기 회사에 사정이 생겨서 못 간다고 했다. 그럼 내일은 가능하냐고 했더니 된단다. 원래 살던 곳을 빨리 비워야 청소도 하고 체크아웃도 할 수 있는데...

피아노를 옮긴고 나머지 짐도 내려 놓은 후 크리스티안은 오늘 나머지 짐을 못 옮기겠다고 했다. 그래서 내일은 되냐고 물었더니 된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체크아웃이 이 주 가까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너무 조급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크리스티안을 짤라버리고 회사에 연락해 불만을 얘기하고 다른 회사를 알아봐도 됐는데, 그땐 왜 그리 조급했는지 모르겠다.

다시 예전 집으로 가서 건물 1층에 남겨놓고 온 상자는 작접 집 안으로 들여놓아야 했다. 모두 책이 가득 담긴 상자였기 때문에 무거웠다. 상자를 엘리베이터에 넣어 8층에서 모두 내리고 다시 하나씩 긴 복도를 지나 집 안에 넣어야 했다. 40분 동안 땀을 뻘뻘 흘리며 상자를 옮겨야 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지만 참았다.

다음 날 크리스티안에게 전화를 했다. 세 번이나 했는데 전화를 받지 않았다. 문자를 보냈지만 답하지 않았다. 더 이상 이 인간을 신뢰할 수 없었다. 영국사랑에 보니 한인 이사업체 목록이 있었다. 그 중 한 곳에 전화해 사정을 이야기했다. 사장님이 저녁에 일 할 수 있다고 한다. 휴...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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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님이 짐을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어, 이게 아닌데... 저녁에 용돈벌이 하려고 왔는데 이건..., 에휴, 이미 금액을 말했으니 바꾸지는 않겠습니다." 내가 말했던 것보다 짐이 훨씬 많았던 모양이다. 구석구석에 숨어있던 짐이 장난 아니었다. 결국 3.5톤 트럭을 가득 채웠다. 나도 놀랬다.

새 집에 와서 짐을 내렸다. 그 많은 짐을 다 내리는 데 1시간도 안 걸린 것 같다. 전날 크리스티안 팀보다 훨씬 빨랐다. 사장님에게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저녁을 대접했다. 이사한지 얼마 안 돼 집 정리가 안 돼 아내가 떡볶이와 라면을 준비했다.

저녁을 먹으며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장님 말씀이 온라인으로 영업하는 이사 업체 중 처음 가격을 싸게 해서 계약을 유도한 후 실제 이사 때 추가 비용을 요구하는 경우가 흔하다고 한다. 박스 가지고 장난을 치는 업체도 많다고 한다. 박스를 널널하게 채워 박스 개수를 늘려 추가 비용을 받기도 하고, 박스 개수가 늘어나면 부피도 늘어나 트럭을 두 번 왔다갔다 해야 할 수 있는데 이 때도 추가 비용을 요구한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산 박스는 너무 얇아서 안 좋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런 박스를 쓰면 욕 먹는다고... 실제로 박스에 책을 넣어 쌓았을 때 책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박스가 터지기도 했다. 사장님은 라면 값이라며 필요하면 쓰라고 자기 회사에서 쓰는 박스 한 묶음을 선물로 주고 갔다.

가지고 있던 현금이 부족해 일부 금액은 송금하기로 했다. 고마운 마음에 원래 얘기했던 액수보다 조금 더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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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업체가 포장한 박스를 풀어보니, 삼분의 일도 안 찬 박스가 태반이었다. 트럭도 제대로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언듯 봤을 때 꽉 채운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선물로 받은 도자기 접시 두 개가 깨져 있었다. 포장도 엉망으로 한 것이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벽에는 가구를 옮기다 그랬는지 찍힌 자국이 선명하다. 나중에 집주인이 뭐라 할 것 같다.

회사 동료들에게 이사 이야기를 했더니 카드사에 전화해 지급정지 신청을 하라고 난리다. 영어 선생도 이 이야기를 듣고는, 말도 안 되는 소리나며 내게 불만을 접수할 수 있는 사이트까지 알려주었다. 그런 쓰레기 같은 회사라면 다른 고객이 당하지 않도록 알릴 의무가 있다는 말도 하면서.

돈 몇 푼 아끼려다 스트레스는 스트레스대로 받고, 아내에게 잔소리는 잔소리대로 듣고, 결국 돈도 돈대로 나갔다. 아무 이유 없이 비쌀 수 있지만 싼 건 다 이유가 있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아마도 1년 안에 또 이사를 해야 할 것 같은데, 다음에는 제 값 주고 좋은 업체를 고용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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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업체 고객 센터에 연락하거나 평이라도 올려야 겠다고 생각했지만 계속 미루고 있다. 아마도 이 모든 걸 영어로 해야 하기 때문인 것 같다. 며칠이나 지나서 크리스티안에게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아 한마디 해줄까 하다가 영어로 버벅이기 싫어 그냥 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