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에서 우연히 발견한 성

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나, 마침내 찾아낸, 컴퓨터가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

스위스에서 우연히 발견한 성

나는 계획을 세워 여행하는 편은 아니다. 그냥 언제쯤 가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다가 여건이 되면 한 1~2주 전부터 부랴부랴 준비를 한다. 즉흥적으로 여행을 결정하니 계획을 제대로 세울 리 없다. 잠 잘 호텔 예약하는 정도면 다행이다.

작년 9월초에 스위스 여행을 갔을 때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괌이나 사이판 같은 데 가서 푹 쉬면서 책이나 잔득 읽고 올까 했는데, 스위스가 좋다는 동료 말에 혹해 급하게 장소를 변경 했다. 구글 어스(Google Earth)로 알프스 계곡을 살펴보니 꼭 가서 직접 봐야겠다는 욕심이 솟구쳤다.

구글어스로 본 알프스 계곡

기차를 타고 융프라우 요흐에 올라 여름에도 하얗게 눈덮힌 산봉우리를 둘러보는 감동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인터라켄에서 푹 쉬고난 후, 다음 목적지인 체르마트(Zermatt)로 가기 위해 기차를 타고 가다가 시온(Sion)이란 조그마한 도시를 지나게 되었다. 기차 안에서 멍하게 창밖을 바라보다가 차창 밖으로 멋진 성이 보였다. 절벽으로 둘러싸인 언덕 위에 성이 있었다. 당장 가보고 싶었지만 기차는 이미 출발했고, 저녁까지는 다음 숙소가 있는 체르마트에 도착해야 했기 때문에 참을 수 밖에 없었다. 돌아올 때 들리기로 하고 사진 한장 찍어두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기차에서 창밖을 보다 발견한 성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시온에서 내렸다. 어떻게 성으로 가야 하는지 몰라 이리저리 한참을 헤메다가 겨우 길을 찾았다. 올라가보니 실제 기차역 쪽에서 봤던 건물은 성이 아니라 성당이었고 맞은 편 언덕에 진짜 성이 있었다. 성당은 보존 상태가 좋았지만 성은 거의 허물어져 벽만 남은 수준이었다.

나중에 구글 어스와 위키백과를 찾아보니 이 성당의 이름은 Basilique de Valère이고, 맞은편에 있는 성 이름은 Château de Tourbillon이다. 아래 사진은 Château de Tourbillon에 올라 Basilique de Valère를 찍은 것이다.

Basilique de Valère

스위스 여행을 준비하면서 이 성에 대한 정보는 어디서도 보지 못했다. 몽트뢰(Montreux)의 시옹 성(Château de Chillon)에 대해서는 여러 자료에 나와있었지만. (여행 준비를 엉터리로 한 탓에 그 유명하다는 시옹성에는 가지 못했다.) 역시 여행 책에 나와있는 게 다가 아니다. 외국 여행을 할 때는 여행 책이나 가이드 같은 것에 의지하게 되지만, 거기에 나와있는 것 말고도 볼 게 많다.

몇년 전 독일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여행 책자에 쾰른은 한시간 반이면 다 볼 수 있다고 되어 있었다. 한 시간 반만에 도시 하나를 얼마나 볼 수 있다는 건지... 이모와 이모부의 안내 덕분에 쾰른 근처에 있는 여러 곳을 구경했다. 조그만 마을의 축제, 궁궐 같이 화려한 성, 성으로 둘러싸인 요새 같은 마을, 노천 탄광도 구경했다. 이모 집 근처 공원도 인상적이었다. 중간에 호수가 있고 거대한 나무로 둘러싸인 공원이었다. 이런 것들은 여행 책자에 나와있지 않았다. 그저 쾰른 대성당과 박물관 같은 것들만 나와있을 뿐이다.

여행을 계획할 때마다 여행이라는 게 뭘까 자문해본다. 패키지 여행을 선택해 가이드를 따라다니며 설명을 듣고, 편하게 이동하며 유명한 곳을 둘러보는 것도 나름 재미있다. 그러나 계획 없이 무작정 돌아다니며 현지인과 부딪히고, 마음에 드는 멋진 곳을 발견하면 죽치고 앉아 마음껏 즐기는 것이야 말로 여행의 참맛이 아닐까 생각한다.

인터라켄에서 하루 죽치고 쉬던 날만 빼면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기차 안에서 보낸 것 같다. 그러나 기차를 타고 창밖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감동적일 만큼 스위스는 아름다운 곳이다. 충분한 준비를 하고 떠난 것은 아니었지만, 융프라우에 올라 알프스 빙하를 감상하고, 돌아다니는 중간에 정말 마음에 드는 성을 발견해 싫컷 즐겼다.

기쁨이 충분한 가치를 가지려면 누군가와 나누어야 한다고 했던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여행하는 내내 멋진 풍경을 함께 즐기고 나눌 사람이 없는 것이 아쉬웠다. 그러나 누군가와 같이 같다면 그렇게 내 마음 내키는대로 마음껏 돌아다니지는 못했을 것이다.

결론: 여행 책자에 나와있는 곳에 다 가봤다고 해서 다 본 것은 아니다. 여행 책자에 안 나온 곳 중에도 좋은 곳이 많다. 그걸 알기가 어렵다는 게 문제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