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존 취업 후기 2
처음에는 아마존에 합격해 미국으로 간다는 생각만으로도 기대에 부풀었지만, 곧 현실과 직면했다. 연봉협상 말고도 비자 신청, 세무 상담, 이사 준비, 현지 집 구하기 등 할 일이 많았다. 이 모든 것을 영어로 진행해야 한다. 가장 큰 문제는 미국 취업 비자를 받는 것이었다.
입사 제의
언젠가 캘리포니아에서 4인 식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 연봉이 16만 달러는 돼야 한다는 글을 봤다. 게다가 미국이란 나라가 결코 살기 좋은 나라는 아니라는 생각도 많이 들었다. 나는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 미국에서도 지금 수준의 삶을 유지할 수 있을까? 리크루터가 어느 정도 받고 싶으냐고 묻길래 OO 정도 받고 싶다고 답했더니 비웃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잘못 들은 걸까? 아무튼, 한국에서 수준의 삶의 질을 유지하려면 그 정도는 필요할 것 같다고 얘기했다.
나중에 오퍼 레터를 받았을 때 연봉이 내가 요구한 것보다 조금 더 많게 되어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부를 걸 그랬나? 내가 요구한 급여 수준이 너무 낮았던 걸까? 여러 생각이 들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너무 높게 불렀다가 거부당하는 것도, 회사에서 내게 너무 높은 기대를 하는 것도 곤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크루터와 전화통화를 하다가 어이 없는 이야기를 듣고 말문이 막혔다. 합격한 게 2014년 12월인데 내가 일할 수 있는 것은 2015년 10월부터란다. '뭐라고, 그럼 거의 열 달을 기다려야 한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았다. 내가 영어를 잘못 이해한 게 아닌가 싶었다.
서너 달 안에 갈 수 있는 줄 알았다. 그전에는 미국에 갈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 비자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조금 찾아보니 미국에서 일을 하려면 H-1B 비자가 필요하고 한다. 2015년 H-1B 비자 쿼터는 85,000개고, 4월 초부터 신청을 받는데 보통 첫 주에 쿼터보다 훨씬 많은 지원서를 받아, 추첨을 통해 심사 대상을 선별한다고 한다. 추첨이라고?!
석사 이상의 학위를 갖고 있으면 학사보다 비자를 받기가 쉽단다. 그래서 리크루터가 석사인지를 확인했나 싶었다. 석사라도 된다는 보장은 없다. 2014년도에 석사가 비자를 받은 확률은 60% 정도였고, 2015년도에는 더 힘들 것으로 예상된다고 한다. 이런 젠장!
아무튼, 입사 제의를 수락했다. 아마존에 붙었다고 대박 나고 인생 핀 건 아니다. 그러나 세계적인 기업에서 일해볼 수 있다는 것, 아이들에게 더 큰 세상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미세먼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 생각해도 충분히 좋아 보였다.
이후 진행
입사 제의를 수락한 다음 갑자기 메일과 전화가 몰려왔다. 비자 신청, 세무 상담, 이사 상담, 현지 주택 관련 담당자가 내게 메일로 연락해왔다. 그냥 메일로 안내해줘도 좋으련만 꼭 통화해야 하나 보다.
세금 관련 컨설턴트가 미국과 한국에서 연락해왔다. 미국 세금에 대해서는 미국 컨설턴트가, 한국 세금에 대해서는 한국 컨설턴트가 설명해주었다. 미국 컨설턴트와 전화로 얘기할 때는 정말 힘들었다. 세금 관련 설명은 한국어로 들어도 어려운데 그걸 영어로 하려니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특히 미국에는 없는 '전세' 같은 개념은 어떻게 설명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통화하는 사람 중에 한국인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한국인인지 물어보고 혹시 한국어로 상담하면 안 되느냐고 물었더니, 안 된단다. 그래도 일부 설명이 어려운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한국어로 설명하고 한국인 컨설턴트가 다시 미국인 컨설턴트에게 설명하는 식으로 진행할 수 있었다.
비자 신청 관련해 읽어야 할 문서는 많았지만 준비해야 하는 서류는 많지 않았다. 서류 정리하고 스캔해서 비자 신청 대행사 사이트에 올렸다. 이사 관련해서도 해당 업체 담당자와 통화했다. 한국에서 쓰던 가전제품을 미국에서도 쓸 수 있는지, 피아노도 옮길 수 있는지 등을 물어봤다. 지역 컨설턴트에게도 연락이 와서, 아이들 키우기 좋으면서 출퇴근도 편한 지역을 추천해달라고 부탁했다.
비자도 안 나왔는데 왜 이렇게 정신없게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정신없이 연락이 오니까 비자가 안 나올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비자
4월 1일, 비자 대행업체에서 H-1B 신청서를 제출했다는 메일이 왔다. 신청서를 제출하긴 했지만, 추첨을 통해 심사 대상자를 선정하기 때문에 추첨에서 당첨된다는 보장은 없다는 설명도 있었다. 한 주쯤 지나 리크루터에게 메일이 왔다. H-1B 신청서를 제출했지만 된다는 보장이 없다, 비자를 받지 못하면 다른 나라에 있는 아마존에 지원할 수 있도록 조처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아일랜드, 독일, 네덜란드, 스페인, 캐나다, 영국, 프랑스, 루마니아, 남아프리카 공화국, 인도, 중국, 일본 중에서 세 나라를 고르면 적절한 옵션이 있는지 확인하겠다고 했다.
내가 할 줄 아는 외국어라곤 영어뿐이었기에 영어가 통용되는 나라로 골랐다. 남아프리카는 치안이 불안하다고 판단해 제외하고, 캐나다, 영국, 아일랜드 순으로 선택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당연히 H-1B를 받을 줄 알았다.
포기
연락이 오지 않았다. 5월 중순이면 대충 결과가 나올 줄 알았는데,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리크루터에게 연락했지만 기다리라는 답변만 들었다. 결국 5월 말쯤에 연락이 왔다. 비자 로터리에 당첨되지는 않았지만, 혹시 빈자리가 생길 수도 있으니 희망을 잃지 말라는 메일이었다. 이때쯤 비자가 안 나오나 보다 생각이 들었다. 그래, 모든 게 너무 순조로웠어. 이렇게 쉬울 리가 없지.
결국, 아마존을 포기하고 다른 회사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다니던 회사에서는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일 자체도 재미가 없었고, 업무를 익히기도 힘들었다. 궁금한 게 있어 물어봐도 제대로 답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소스가 너무 복잡해 간단한 요구사항을 반영하는 데도 많은 시간이 걸렸는데, 대부분 시간은 고칠 위치를 찾는 데 허비었다. 회사 분위기는 점점 이상해지고 있었다. 시스템이 굴러가고 있다는 게 기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모든 게 짜증 났다. 어쩌면 아마존 때문에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되살아난 불씨
괜찮아 보이는 회사가 있어 지원해서 합격했다. 이 나이에도 옮겨갈 회사가 있다는 데에, 이 늙은 프로그래머를 뽑아준다는 데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분위기도 괜찮았고, 사업 내용도 마음에 들었고, 사람들도 좋아 보였다. 거의 가겠다고 말할 뻔했다.
바로 그때 아마존 리크루터로부터 메일이 왔다. H-1B 로터리에 당첨되지 않아 다른 나라에 자리가 있는지 알아봤는데, 영국 런던의 아마존 인스턴트 비디오에서 내게 관심이 있다고, 자세한 내용은 영국의 리크루터가 알려줄 거라는 내용이었다. 마치 한 줄기 빛살이 어둠을 가르고 비추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원했던 회사에는 못 가게 되어 죄송하다는 메일을 보냈다. 영국 리크루터와 전화통화 시간을 조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