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존 취업 후기 3

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나, 마침내 찾아낸, 컴퓨터가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

아마존 취업 후기 3

영국 리크루터와 통화하기로 약속을 잡고 나니 몹시 긴장되었다. 예전에 H-1B가 나오지 않아 다른 나라로 지원하게 되면 면접을 새로 봐야 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기에, 면접을 다시 봐야 하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영국 영어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을지도 걱정되었다.

통화

리크루터에게 통화할 때 구글톡 같은 채팅 프로그램을 보조 채널로 사용하면 어떻겠냐고 했더니,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게 있으면 몇 번이고 다시 말해줄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리크루터와 통화하며 미국 비자가 안 나와 좌절했는데 영국도 그런거 아니냐고 물었더니 영국은 비자 심사가 훨씬 투명하고 기간도 적게 걸린다고 한다. 리크루터가 내 경력과 맞을 것 같은 팀을 간단히 소개하며 관심이 가는 팀을 선택해 알려달라고 했다. 하드웨어 관련 팀을 제외한 네 팀을 선택해 알려줬고, 리크루터는 각 팀의 매니저와 일정을 조율해 팀 소개 시간을 알려주었다.

팀 소개

각 팀 매니저가 팀을 소개하며 내게 질문도 하는 시간일꺼라 추측했는데, 완전히 팀을 소개하는 시간이었다. 내게 궁금한 게 없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할 뿐이었다.

"당신은 이미 킨들팀에 합격했기 때문에 추가적인 면접은 없습니다. 여기서도 충분히 잘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팀당 30분에서 1시간 정도 설명을 들었다. 각 팀별로 어떤 업무를 하는지, 어떤 도구를 사용하는지, 팀원 구성은 어떤지 등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나는 비즈니스 보다는 기술에 관심이 많으므로 업무 중심적으로 보이는 팀은 제외했다. 그리고 내가 모르는 언어와 도구를 사용하는 팀도 제외했다. 모르는 언어라도 Haskell 같은 언어였다면 도전해볼만도 했겠지만, Perl을 배우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리고 내부 시스템을 개발하는 팀보다는 최종 사용자에 서비스를 제공하는 팀에서 일하고 싶었다. (On call의 부담을 생각했을 때, 잘한 결정인지는 모르겠다.)

특이했던 것은, 팀 매니저가 나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내가 가고 싶은 팀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선택한 팀을 알려주자, 리크루터도 그 팀이 내 경력과 적성에 가장 잘 맞을 것 같다고 했다.

연봉 협상

리크루터는 연봉 협상 전에 인터넷으로 충분히 조사해보라고 몇 번씩 강조해 말했다. 그러나 아무리 인터넷을 찾아도 영국의 급여수준을 알 수 있는 자료는 나오지 않았다. 겨우 한 사이트를 찾긴 했는데, 영국의 급여는 실망스러운 수준이었다. 아니, 물가는 더 높은데 왜 급여수준은 미국보다 낮단 말인가?

결국 리크루터와 연봉을 협상할 때 주겠다는 대로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데이터가 많지는 않았지만 대충 알아본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미국에서보다 훨씬 줄어든 금액이었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연봉 협상 직전에 아마존 주가가 크게 올랐는데, 리크루터는 그 덕에 내가 더 많이 받을 수 있게 됐다고 이야기했지만, 나는 더 적게 받게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TB 테스트

입사 제안 조건을 수용하자 바로 이후 절차가 시작되었다. 미국에 지원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비자, 세무, 이사, 지역 담당자의 연락 러시가 시작되었다. 먼저 필요 서류를 준비해 비자 대행 업체 웹사이트에 업로드하는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TB 테스트도 받아야 했다. 영국에 비자를 받으려면 반드시 TB 테스트 결과를 함께 제출해야 한단다.

신촌 세브란스에 전화해 예약을 했더니, 검사 비용이 무려 어른은 8만원, 어린이는 5만원이나 한단다. 검사 비용만 26만원... 그런데 막상 검사는 간단했다. 간단한 문진을 하고 어른은 엑스레이 촬영을 했고, 아이 둘은 그냥 문진만으로 끝났다.

며칠 뒤 검사 결과가 나왔다. 모두 정상. 돈이 아깝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IELTS 시험

비자 대행 업체에서 내게 영어 시험을 봐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그 전에 내 학위 증명서를 올리면 영어 시험이 필요한지 확인해주겠다고 얘기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 석사는 시험을 안 봐도 될 거라 내 멋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나중에 문서를 자세히 읽으니 영국 정부가 인정하는 기관(학교)에서 영어로 교육을 받았다는 것이 확인되는 경우만 영어 시험을 보지 않아도 된다고 되어 있었다. 나는 학교에서 영어로 교육을 받은 게 아니기 때문에 영어 시험을 봐야 했다.

세무 상담, 이사 등 다른 사항을 모두 영어 시험 이후로 연기했다. 어차피 영어 점수를 못 받으면, 비자를 못 받으면 소용 없는 것이었다. 부랴부랴 IELTS 교재를 구입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공부를 오래 할 시간은 없었지만, 시험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정도는 알고 싶었다. 비자 지원용 시험 응시료는 36만원을 넘기 때문에 한 번에 필요한 점수를 얻고 싶었다. 영국 비자 지원을 위해서는 IELTS 레벨 4 이상의 점수가 필요한데 레벨 4라는게 별로 높은 수준은 아니어서 대충 봐도 필요한 점수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비싼 돈 주고 보는 시험인데 기왕이면 잘 보고 싶었다.

시험 날짜까지 3주 정도의 시간이 있어 저녁과 주말을 이용해 공부했다. 듣기와 읽기는 어떻게든 될 것 같은데 쓰기와 말하기가 걱정이었다. 내가 잘 아는 주제에 대해서라면 어떻게든 하겠지만, 내가 전혀 관심이 없는 주제에 대해 쓰고 말하라고 하면...

시험 당일, 듣기, 읽기는 무난하게 넘어갔다. 읽기의 경우 마지막 지문이 많이 어렵게 느껴졌다. 아마 마지막 지문에서 점수가 많이 깎이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쓰기의 경우 다행히 제시된 주제에 대해 할 말을 생각할 수 있었다. 다만 말하기가 문제였다. 처음부터 내가 관심도 없는 사진에 대해서 계속 물어보더니 급기야 수공예에 대해 말하라는 과제가 떨어졌다. 젠장... 한국에서는 먹고살기 바빠서 그런 거에 관심 갖기 힘들다는 식으로 말했더니 시험관이 초등학교 때 간단한 것도 만들어 본 적이 없냐고 물었다. 그래서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 나무로 간단한 상자 같은 것도 만들고 찰흙으로 그릇 같은 것도 만들어봤다고 얘기했다. 높은 점수를 받기는 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응시 13일 후 결과가 나왔다. 내가 목표한 점수를 받았다. 그런데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잘 했으면 한 단계 높게 나올 수 있었을텐데...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다.

비자

결혼 증명서와 아이들 출생 증명서를 제출해야 했는데 번역이 필요했다. 증명서를 스캔해 보낸 다음 번역이 지원되는지 문의했더니 당연히 된단다. 처음 번역본은 이름 철자가 잘못 되어 있어 수정을 요청했다. 페덱스로 며칠 만에 수정된 번역본을 받을 수 있었다.

비자 대행 담당자에서 80쪽 분량의 신청서를 보내왔다. 내용을 확인한 다음 잘못된 곳이 없으면 복사해서 복사본과 함께 제출해야 한단다. 제대로 작성했을 거라 믿었지만 확인해보니 잘못 기재하거나 입력이 누락된 항목이 눈에 띄었다. 담당자에게 문의하니 이상하다며, 자기가 확인했을 때는 모두 이상이 없었다고 한다.

잘못된 곳을 정정해 복사한 다음 예약된 날짜에 비자 지원 센터에 갔다. 창구는 많았지만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곳 직원에게 물어보니 지금은 비수기고 여름방학 때는 난리가 아니라고 한다. 창구 직원에게 서류 한 뭉텅이를 제출했더니 한장 한장 확인하며 불필요한 서류는 돌려주고 필요한 서류만 가져갔다. 온라인 신청으로 바뀌어 예전처럼 서류를 많이 제출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원본이 필요한 경우는 원본과 사본을 모두 제출하면 비자 심사가 끝난 후 원본은 돌려준다고 했다. 아무 생각 없이 원본이 필요하지 않다고 답했는데, 집에 와 생각해보니 서류 번역본은 돌려받겠다고 할껄 그랬다.

신청 후 사흘만에 메일이 왔다. 한글날과 주말이 끼어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영업일로 치면 하루만이고, 영국의 영업일로 치자면 이틀만이다. 메일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Dear ...
Application Reference : ....

A decision has been made on your application and ...

비자가 나왔다는 뜻으로 granted나 permitted 같은 단어가 있을 거라 기대했지만, 그런 표현은 없었다. 혹시 비자를 거부하기로 결정되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의심되었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이 표현의 진의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나 말고도 많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나 명확한 답은 찾지 못했다. 비자 대행 담당자에게 물어보니 비자가 나온 거라며 축하한다고 했지만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그 다음날 비자 지원 센터로부터 여권을 찾아가라는 메일이 왔다. 비자 지원 센터에 가서 여권과 비자를 찾아왔다. 30일짜리 임시비자로, 30일 기간 안에 영국에 입국해 정식 거주 허가를 받아야 한다. 정말 가는 건가? 꿈만 같았다.

이주 준비

비자를 받은 다음 세무 상담, 이사 준비, 현지 주택 조사 등을 진행했다. 이 모든 것을 영어로 진행해야 했다. 짧은 영어 실력으로 메일 보내고 전화 통화하고 문서 검토하려니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그 와중에 이사짐을 배로 영국에 보내는 데는 8주 이상 걸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막연히 한 달 정도면 되겠지 했는데, 생각해보니 영국으로 가려면 대륙을 빙빙 돌아 가야 하니 미국 서부로 갈 때보다 더 오래 걸리는 게 당연했다. 부랴부랴 선박으로 이사짐 보내는 일정을 앞당겼다.

이사짐 목록 정리하는 것도 매우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사고를 대비해 고가 물품에 대해 목록을 정리해야 했는데 모두 정리하기가 힘들었다. 며칠 동안 씨름하다 결국 어느 정도로 타협했다. 사고 없이 무사히 도착하기를 기대하면서. 이사짐을 보내고 나서는 집 안에서 캠핑하듯 지냈다. 출국 전날, 남아있던 짐까지 비행기로 보내고는 이웃집에 이불을 빌려 잠을 잤다. 시간이 부족해 집을 깨끗이 정리하지 못했는데, 같은 단지에 사는 아내 친구분들이 도움을 주기로 했다.

살고 있던 아파트는 월세를 놓기로 했다. 월세를 받아 영국 생활비에 보탤 요량이었지만, 이렇게 받는 월세도 40% 가량 세금을 내야 할 것 같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계좌 정리하고, 외환 계좌 만들고, 환전하느라 시간이 많이 들었다. 해외로 송금하기가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인터넷과 휴대폰을 해지했다. 그리고 영국에서 한국으로 전화할 때 사용할 인터넷 전화를 개통했다. 기존에 사용하던 인터넷 전화는 해외에서 된다는 보장이 없어 새로 장만했다.

인사

회사에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미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미련은 없었다. 이 회사는 나와 맞지 않았다. 나는 여기서 충분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 회사도 나도 손해였다. 친했던 사람 몇 명에만 이야기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에 소문이 쫙 퍼졌다고 한다. 회사가 아마존 출신을 우대하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는데, 우리 중에서도 아마존으로 가는 사람이 있어 통쾌하다는 이야기도 있었단다.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한국을 떠나기 전에 친구와 지인들에게도 연락을 했다. 다행인지, 발이 넓지 않아 인사할 사람도 많지는 않았다. 영국으로, 아마존으로 가게 됐다는 말에 부러워 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정말 좋은 것인지 확신은 없었다.

걱정

대충 알아본 사실만으로도 영국에서의 삶이 여유로워 보이지 않다. 대략 £10,000 정도의 소득공제가 있긴 하지만, 소득세율이 한국보다 훨씬 높아 보인다. 월세도 장난이 아니다. 런던 시내에 가족이 지낼 집을 구하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런던 외곽의 도시에서 기차로 출퇴근하는 게 조금 나아 보이는데, 방 두 개짜리 집의 월세는 최소 £1,000 이상 생각해야 한다. 출퇴근 시간은 대략 1시간 조금 안 된다고 하니 지금보다 조금 덜 걸릴 듯 하다. 그러나 교통비가 장난 아니다. 한국에서보다 10배 가까이 교통비를 지불해야 한다. 영국에서는 교육비와 의료비가 공짜라지만 수준에 대해 말이 많다.

연봉은 한국보다 훨씬 많지만 뺄 것 다 빼고 나면 실제 남는 돈은 오히려 줄어들 것 같다. 생활비가 얼마나 필요할지 감이 잡히지 않지만 런던 물가가 서울보다 낮을 것 같지는 않다. 돈만 생각한다면 안 가는게 나을 지도 모르겠다.

기대

기대도 있다. 아마존이란 세계적인 회사에서 전 세계 사람들이 사용할 서비스를 개발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대단한 것 아닌가. 지금보다 젊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이제라도 기회를 얻게 된 데 감사한다. 직장 생활을 시작한 후 항상 가지고 있던 궁금증을 풀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있을까? 우리와 다른 획기적인 방식으로 일하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와 별반 다를게 없을까?

예전에 유럽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때는 그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영국에서 살게 되었다. 정말 인생은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