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나, 마침내 찾아낸, 컴퓨터가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

영어

한국에서는 동기가 부족했다.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가도 의욕이 금세 사그라졌다. 늘 '영어를 많이 사용할 수 있는 환경에 있으면 실력이 많이 늘 텐데...' 푸념했다. 영국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기대가 컸다. 어려움이 있었지만, 휴대폰도 개통했고, 집도 구했고, 은행 계좌도 만들었고, 큰 아이 학교도 등록했다. 아이들 데리고 병원에도 갔었고, 회사도 다니고 있다. 집에서 식구들과 말할 때 빼고는 거의 영어를 사용해야 한다. 영어를 많이 사용할 수 있는 환경, 내가 항상 바랐던 환경에 처한 것이다.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부터 영어를 잘하고 싶었다. 높은 영어 시험 점수나 학점을 바란 게 아니라, 영어를 정말 잘하고 싶었다. 외국 사람이 영어로 말하는 것 다 알아듣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영어로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시험 점수나 학점은 영어를 잘하게 되면 자연히 따라오는 것으로 여겼지 목표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게 영어 시험 점수를 잘 받기보다 훨씬 어렵다는 것은 잘 안다. 영어 실력을 가늠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토익 시험을 보기도 했다. 처음에 어떤 시험인지 파악할 때를 제외하고는 토익 교재로 공부하지 않았다. 받아쓰기, 영영사전, Grammar in Use를 활용했고, 영어학원 프리토킹 수업에 가기도 했다. 열심히 했을 때는 제법 괜찮은 점수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영어를 말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얼마 안 가 시들해지곤 했다.

이제 영국에서 살게 되었다. 모든 걸 영어로 해야 한다. 영어가 생존의 문제가 되었다. 처음 도착했을 때는 긴장감이 있었다. 집중해 들어도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말을 해야 할 때는 미리 어떤 말을 할지 종이에 써서 정리한 다음 말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하는 말을 좀 더 많이 알아듣게 되었다. 조금씩 발전하는 것 같아 기분도 좋아졌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듣기도 말하기도 더는 발전이 없다. 말하기는 처음보다 더 버벅거리는 것 같다.

매일 아침 스프린트 회의를 하지만 다른 팀원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 내 차례가 되면 되지도 않는 말로 얼버무려 넘어간다. 다들 내가 하는 말을 이해는 하겠지 생각하지만, 점점 더 부끄러워진다. 다른 회의 시간에도 그냥 조용히 앉아 있을 뿐이다. 무슨 말을 하는지 거의 알아듣지 못한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쉽게 말할 수 없다. 처음에는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이해해 주었겠지만, 과연 지금도 그렇게 이해해 주는지는 모르겠다. 속으로 '쟤는 커뮤니케이션이 안 되네. 같이 일하기 힘들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걱정된다.

읽기와 쓰기는 조금 낫지만 듣기와 말하기 문제를 상쇄할 정도는 아니다. 회의 시간에 설계 문서를 나눠주고 읽으며 의견을 교환하는 경우도 많은데, 짧은 시간 동안 빽빽하게 채워진 문서를 읽어야 한다. 누가 내게 질문하지 않기를 바라며 조용히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끔 질문을 하기도 하지만 대답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니 소용없다.

쓰기는 즉각적인 반응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상황이 조금 낫긴 하다. 뭘 쓸지 생각만 있으면 사전 찾아가며 그럭저럭 문서를 작성할 수 있다. 최근 팀에서 사용할 간단한 라이브러리를 만들고 문서 작업을 했는데,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그렇다면 말하는 대신 글로 써서 커뮤니케이션을 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될 리가 없지 않은가. 제일 큰 문제는 말을 잘 못 알아 듣다 보니 팀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겠지 생각했다. 동료들도 그렇게 말하며 위로해 주었다. 정말 익숙해지긴 했다. 못 알아듣는 상황에... 좀 더 젊었을 때 왔으면 나았으려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내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 와중에 가족까지 챙겨야 하니 주의와 노력이 분산될 수밖에 없다. 젊었을 때 '너 정도면 외국에 가서도 잘할 것 같은데 왜 알아보지 않느냐?'는 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그때는 외국에 나가 사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했다. 영국에서 살게 된 것도 내가 적극적으로 노력한 결과가 아니다. 어쩌다 보니 외국 회사에 합격했고, 어쩌다 보니 오게 되었다. 어떻게 되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만 했을 뿐 준비는 턱없이 부족했다.

다시 영어 공부를 시작해야겠다. 살기 위해서. 이런 상태라면 머지않아 회사 생활이 큰 위험에 처할 것 같은 불안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