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의 1년
개요
가족과 함께 외국에 와서 적응하는 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어려웠다. 내 한 몸 챙기기도 버거운데 가족 일까지 신경을 써야 해서 힘에 부쳤다. 한국에서 회사를 옮긴 경우에는 새 회사에 적응하는 데 집중할 수 있었지만, 여기서는 나만 적응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다른 식구들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영어
영어를 사용할 기회가 많으니 영어 실력도 당연히 늘 것이라 생각했다. 영어권 국가에 살면서 영어를 잘 못하는 사람들은 게을러서 그런 것이고, 나는 다를 거라 생각했다. 얼마나 오만한 생각이었던가.
분명 처음 왔을 때보다 늘긴 했다. 병원에서 의사의 설명을 듣고, 학교에서 교사와 이야기하고, 부동산에 집에 생긴 문제를 고쳐달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은행에서 금융상품 설명을 듣고 새로운 저축 계좌를 열 수 있다. 모기지 브로커와 상담할 수 있다.
그러나 크게 발전하지 못한 것도 분명하다. 동료들과 이야기할 때 여전히 단순한 대화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조금 복잡해지면 이내 포기하고 만다. 네이티브 스피커들끼리 빠르게 주고 받는 말은 거의 알아듣지 못한다.
신경이 곤두세우고 모든 이야기를 이해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없어졌다.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제는 못 알아듣는 상황에 익숙해졌다. 영어로 자유롭게 다양한 주제를 이야기하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회사
회사 업무를 따라 잡는 것도 쉽지가 않다. 배워서 익숙해지는 업무는 미미한데 비해 새로 배워야할 업무는 빠르게 늘어난다. 시간도 부족하고 힘도 달린다. 처음에는 1년쯤 지나면 적응하겠지 싶었는데, 이제는 적응이 안 끝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아마존 개발 환경은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업계 표준 도구가 아닌 아마존 내부 개발 도구를 사용한다. 훌륭한 도구도 있지만 별로인 경우도 많다. 이런 내부 도구들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 쉽게 바꾸기 어렵다.
특히 온콜이 힘들다. 이제 온콜이 두렵지는 않지만 힘든 건 여전하다. 언제 삐삐가 울릴지 모르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니다. 지난 온콜 때는 일주일 내내 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잤다. 그 후유증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최근 프로젝트 때문에 야근을 많이 하긴 했지만, 야근은 정말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면 거의 하지 않는다. 그러나 업무 압박은 장난이 아니다. 어쩌면 내가 일을 잘하지 못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세금
영국의 소득세 계산 방법은 한국처럼 복잡하지 않은 것 같다. 전체 소득에서 11,000 파운드는 소득공제, 11,001 파운드부터 43,000 파운드에 대해서는 20 퍼센트, 43,001파운드부터 150,000 파운드는 40 퍼센트 세금을 낸다.
예를 들어, 연 소득이 60,000 파운드라면, 11,000 파운드는 소득공제, 11,001 파운드 이상 43,000 파운드 이하의 금액인 32,000 파운드에 대해서는 20%인 6,400 파운드, 43,001 파운드 이상의 금액인 17,000 파운드에 대해서는 6,800 파운드 세금을 내야 한다. 따라서 전체 세금은 13,200 파운드가 된다.
연 소득이 6만 파운드인 경우 소득세 비율은 22%가 된다. 그러나 의료보험료도 내야 한다. 소득세 계산기에서 계산을 해보면 연 소득 6만 파운드인 경우 한 달에 집에 가져갈 수 있는 돈은 3,522 파운드다. 6만 파운드면 한화로 9천만원에 달하는 금액이지만 이것저것 제하고 나면 한 달에 5백만원 조금 넘게 가져갈 수 있다.
아마존은 한국 회사처럼 회사에서 연말정산을 알아서 해주는 것 같지 않다. 첫 해는 외부 컨설팅 회사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해주지만 다음 해부터는 알아서 해야 한다.
한동안 세금이 너무 많이 나갔다. 다음 달이 되면 괜찮아 지겠지 하며 몇 달을 보냈는데도 바뀌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냥 가만히 있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다. 결국 안 되겠다 싶어 회사에 물어봤더니 HMRC에 직접 연락해 문의하라는 답을 들었다.
HMRC에 전화해 물어보니 내 예상 소득이 엄청나게 높게 잡혀 있어 세금을 많이 낸 것이라 했다. 진철하게 세금코드를 변경해 주며 다음 달부터 세금이 적게 나갈꺼라 했다. 그리고 지난 해 세금에 대해서도 환급신청을 하라고 안내해 주었다.
영국의 과세 연도는 4월 6일부터 다음해 4월 5일까지다. 내년에 연말정산을 직접 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다.
물가
월세와 교통비가 미친 듯 비싸다. 나는 런던에서 조금 떨어진 워킹이란 동네에 사는데, 월세가 적게 드는 대신 교통비가 많이 든다. 교통비에 조금 돈을 더 보태면 런던에서 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한적하면서 편의 시설이 잘 갖춰져 있고 교통도 편리해 만족한다.
먹거리는 한국보다 싼 것 같다. 그러나 이게 사람 손을 거치면 비싸진다. 런던에서 점심을 먹으려면 테이크 아웃으로 싸게 사도 보통 5파운드는 든다. 식당 안에서 먹으면 돈을 더 내야 한다. 2~3 파운드 하는 냉동 도시락도 있지만 먹을만하다 싶으면 4파운드 이상 내야 한다.
휘발유는 리터당 1파운드가 조금 넘는데 환율을 고려하면 한국보다 비싸다. 최근 파운드화 가치가 떨어져서 그런지 기름값이 계속 오르는 것 같다. 그래도 월세와 교통비를 지출을 제외하면, 그럭저럭 먹고 살 만 한 것 같다. 집을 사서 월세 부담을 덜면 좀더 여유가 생길 것 같다.
교통
집에서 회사까지의 교통은 나름 편한 편이다. 40킬로미터 가까운 거리지만 급행 기차와 전철을 타면 1시간 내에 회사에 도착할 수 있다. 대신 차비가 더럽게 비싸다. 1년 정기권으로 구입하면 할인이 되긴 하지만 여전히 비싸다.
런던 지하철은 지은 지 오래돼서 그런지 서울과 비교하면 초라하다. 복도도 좁고 천정도 낮다. 지하철 역은 사람들의 동선을 고려해 많은 인원이 효과적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설계된 것 같지는 않다.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가 있긴 하지만 충분하지 않고, 이런 시설이 없는 역이나 환승 경로도 많다.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런던 지하철을 이용하는 것은 고역이다.
교통비가 비싸서인지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전철 두세 정거장 정도는 걸어다니는 경우도 많다. 기차역 주변에는 자전거 주차장이 준비되어 있고, 회사에도 자전거를 보관하는 시설과 샤워장이 준비되어 있다.
운전
대중교통 요금이 비싸기 때문에 운전을 하는게 더 싸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자동차 소유 비용도 결코 낮지 않다. 일단 차 값에 큰 돈이 들어간다. 도로세도 내야 하고 보험료도 내야 한다. 휘발류 값도 비싸다. 어딘가 가면 주차비도 내야 한다. 그러나 아이들과 함께 움직이려면 자동차 없이는 힘들다.
영국은 차선 방향이 반대다. 자동차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고, 왼쪽 차선으로 가야 한다. 처음에는 운전할 때마다 바짝 긴장했지만 이제는 익숙해졌다. 영국 운전자들은 대체로 양보를 잘 하는 것 같다. 차선을 바꾸기 위해 깜박이를 켜면 거의 항상 양보해준다. 한국보다 운전하기는 편하다.
한국에서 상향등을 깜박 거리는 것은 상대 운전자에게 위협을 가하거나 화풀이를 하려는 목적이지만, 영국에서는 고맙다는 표시 또는 양보를 나타낸다. 좁은 길에서 마주오는 차에게 상향등을 한번 깜박 하면 '양보할 테니 먼저 가시오'란 뜻이다. 그럼 상대방도 고맙다는 뜻으로 상향등을 깜박 한다.
날씨
비와 안개로 유명한 런던 날씨에 처음부터 기대를 하지 않아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막상 살아보니 한국보다 훨씬 좋은 것 같다. 한국에 비해 여름은 시원하고 겨울은 따뜻하다.
여름도 정말 더운 날은 며칠 정도에 불과하고 습도가 높지 않아 에어컨이 없어도 크게 불편하지 않다. 겨울도 거의 영상의 기온을 유지해 춥다는 느낌은 거의 들지 않는다. 한국의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을 생각하면 천국이라 할 수 있다.
여름에는 해가 길어 밤 10시가 되어야 해가 지지만 여름에는 해가 짧아 오후 서너 시면 어두어둑해진다. 여름에는 퇴근해 집에 도착해 저녁을 먹고 나도 밖이 환하다. 겨울에는 오후 네시 정도면 벌써 깜깜지고 흐린 날이 많다 보니 꿀꿀하긴 하다.
교육
큰 아이가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촌 동네 있는 학교로 아주 좋은 학교는 아니지만, 한국의 어느 초등학교보다 여유로워 보인다. 천연 잔디가 깔린 운동장, 도서관, 실내체육관 등 시설도 훌륭하다.
한 반에 학상 스무 명 정도에 교사가 두세 명 있다. 아직 교육 수준을 이야기하기는 어렵지만 지금 큰 아이가 다니는 학교는 '구구단만 외우면 졸업할 수 있다'는 말이 들리기도 한다. 학교에서 공부로 아이들에게 스트레스를 주지 않는 것 같다.
큰 아이는 학교에 잘 적응하고 있는 것 같다. 말을 못해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게 아닐까 걱정했는데 처음의 어려운 시기를 잘 넘긴 것 같다. 조금 더 지나면 영어를 잘 하게 될 것이다. 한국말을 잊지 않게 하는 게 더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아내는 얼마전까지 무료 영어 교육을 받았다. 교육의 질이나 교사의 성의에 대해 불만이 있는 것 같지만, 교육을 받는 동안 아이를 돌봐주는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하다는 생각이 든다.
병원
거주지를 정하면 GP를 등록해야 한다. 의료 수준은 한국보다 나은지 못한지 잘 모르겠지만, 병원에 갈 때 비용이 따로 들지 않아 좋다. 아이들의 경우는 처방전을 받으면 약도 돈을 내지 않는다. 감기 정도는 아무런 약도 주지 않으며 세균성 질환이 아니면 항생제도 주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웬만하면 아예 병원에 안 가게 되었다. 집에서 어느 정도 경과를 보고 심각하다 싶을 때만 병원에 간다. 한국에 있을 때 하루가 멀다하고 병원에 가서 효과가 의문인 약을 먹이던 것과는 많이 달라졌다.
치과는 GP와 별도로 등록해야 하며 등록 비용도 따로 받는다. 치료에 따라 다르지만 간단한 검진은 무료고 치료를 하는 경우는 따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얼마전 아내가 치과에서 치료를 받았는데 의사도 매우 친절했고 치료도 문제 없이 잘 된 것 같다.
병원에 따라 다르겠지만 지금까지 본 의사들은 한국에 비해 매우 친절하며 질문을 하면 아주 자세히 설명을 해준다. 권위적인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경험이 적은 의사는 환자 앞에서 책을 뒤적이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조금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조금 애매한 경우도 있다. 영국에서는 안과나 이비인후과, 피부, 정형외과 같은 전문 병원을 찾기가 어렵다. GP에서 치료할 수 없으면 상급병원으로 갈 수 있는데 응급 상황이 아니면 대기 시간이 길다고 한다. 그래서 사립병원으로 가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사립병원은 진료비가 상상을 초월한다. 영국에 처음 왔을 때 큰 아이가 몸이 안 좋아 사립병원에 갔을 때 의사 한 번 만나고 75파운드를 내야 했다. 파운드화 가치가 떨어진 지금 환율로 계산해도 10만원이 넘는 돈이다. 그저 아프지 않는 게 상책이다.
통신
한국과 비교해 휴대폰 통화료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국보다 서비스 품질이 낮은 것은 확실하다. 지하철만 들어가면 통화가 안 되고, 기차를 타고 가다 보면 통화가 됐다 안 됐다 한다.
그러나 쓰는 만큼 내는 요금제가 있다는 게 큰 장점이다. 나처럼 휴대폰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 경우는 10 파운드 충전해 놓으면 서너 달은 쓰는 것 같다. 기본요금에 채우지도 못하는 무료통화시간을 받는 것보다 훨씬 좋다.
기차에 타면 와이파이를 사용할 수 있지만 접속이 안 되는 경우가 더 많다. 지하철 역에서도 와이파이 연결이 가능하지만 개인정보를 제공해야 해서 안 쓰고 있다. 지하철에서는 책을 보는 게 더 나은 것 같다.
인터넷은 느려 터진데다 요금도 비싸다. 특히 업로드 속도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느리다. 초고속 인터넷 연결을 선전하기도 하지만 아무데서나 다 되는 것도 아니고 가격도 비싸다.
정리
모든 커뮤니케이션을 영어로 해야 한다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니다. 별로 좋지도 않은 내 두뇌 CPU의 30~40 퍼센트는 항상 영어를 처리하는 프로세스가 차지하고 있다.
환경이 바뀌어 배워야 할 것도 많은데 그게 다 영어로 되어 있으니 CPU에 과부하가 걸릴 수밖에 없다. CPU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니, 살아남으려면 영어 처리 알고리즘을 개선하는 수밖에 없다.
회사에서 그리 성공적이지는 못했지만, 짤리지 않고 잘 버텼다. 신경쓸 일들이 너무 많아 회사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갈 길이 멀지만 그래도 많이 적응했다. 내년에는 올해보다 잘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