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은행 계좌 만들기

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나, 마침내 찾아낸, 컴퓨터가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

영국 은행 계좌 만들기

영국에 와서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 중 하나가 은행 계좌 만들기였다. 영국에 오기 전 이주 담당자가 Lloyds와 Nat West 두 은행을 소개해 주었다. 특히 Lloyds를 선택할 경우 계좌를 신속하게 만들어주는 절차가 있다고 하며 매니저 전화번호와 메일주소까지 알려주었다. 그래서 나처럼 이주하는 사람들을 위해 미리 준비된 절차가 있을 거라 기대했다.

런던에 도착한 후 열흘 정도가 지나서야 은행 매니저에게 연락할 수 있었다. 제일 급하고 중요했던 집 구하는 일에 온 신경을 쓰다 보니 여력이 없었다. 영어로 말을 해야 하는 것도 부담이어서 연락을 미루기도 했던 것 같다. 전화보다는 메일이 나을 것 같았지만, 메일에 뭐라 써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은행에 계좌 개설 요청을 할 때 어떤 식으로 메일을 보내야 하는지 예제를 찾을 수 있었다.

겨우 메일을 써서 보냈더니 금방 답장이 왔다. 전화로 이야기하자며 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다. 그냥 메일로 답장을 줘도 좋은데 굳이 전화 통화를 하자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통화는 거의 30분 정도 했던 것 같다. 계좌에 대한 간단한 설명과 계좌를 만드는 데 필요한 서류와 절차 등을 설명해 주었다. 계좌를 만들려면 반드시 지점을 방문해야 하며 예약을 해야 한다, 서류는 지점을 방문했을 때 제출하면 된다, 지점 담당자가 다시 내게 전화할 것이다 등을 설명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틀쯤 지나 메일이 왔다. 방문 일정을 정하기 위해 내게 연락을 시도했지만 연결되지 않았다며 내게 전화를 걸라는 메일이었다. 내게 연락 온 것은 없었는데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전화를 걸었다. 대부분 내용이 지난번 통화와 겹쳤다. 그런데 잘 나가다가 문제가 생겼다. 내 한국 주소에 대한 증명이 필요하며 그를 위해 전기 요금 영수증이나 가스 요금 영수증, 전화 요금 영수증 같은 게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주소 증명에 그런 영수증이 필요할 것이란 생각은 못했다. 대신 주민등록등본을 제출하면 안 되냐고 했더니 안 된단다. 한국 정부에서 발행한 서류를 왜 받지 않느냐 했더니 규정이 그렇다고, 무조건 전기/가스/전화 요금 영수증을 내야 한단다. 짜증이 치밀어 올라, 그런 영수증이 있다 해도 그게 다 한국어도 되어 있을 텐데 너희가 어떻게 알아볼 수 있냐고 했더니 그걸 번역하는 전문 번역팀이 있다고 한다. 말문이 막혔다. 젠장!

전화를 끊고 나서 생각했다. 이걸 어쩌지? 아니 여기서 왜 한국 주소 증명이 필요하단 말인가? 이러다가 영국에서 은행 계좌를 못 만드는 거 아닐까? 그럼 월급은 어떻게 받지? 온갖 생각이 떠올랐지만 도움이 되는 건 없었고 머리만 복잡해질 뿐이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아직 집을 계약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은행 계좌에 신경을 못 쓰기도 했고, 신경을 썼다 해도 없는 영수증을 만들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주 담당자가 알려주었던 다른 은행인 Nat West에서 계좌를 만들까 생각했지만 거긴 계좌 개설 신청서를 작성해 우편으로 보내야 했다. 신청서를 작성하는 일, 우편으로 보내는 일 모두 귀찮았다.

어느 날 문득 HSBC에 연락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 바로 앞에 HSBC 지점이 있으니 어쩌면 더 편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무작정 전화를 걸어 보았다. 전화를 받은 사람의 영어 발음은 정말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방문 일정을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약속 시각에 회사 바로 앞에 있는 HSBC 지점에 방문했다. 혹시나 해서 이런저런 서류를 잔뜩 준비해 갔는데, HSBC에서 원하는 것은 여권과 비자(BRP 카드), 그리고 회사의 레퍼런스 레터였다. 내가 Lloyds에서 겪은 일을 이야기하며 HSBC가 훨씬 유연한 것 같다고 하자 '우리는 아마존을 잘 안다. 여기 레퍼런스 레터가 있는데 이거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하냐?'고 반문했다. 다만 레퍼런스 레터에 주소가 임시 숙소로 되어 있는데 그것만 이사 가서 살 곳의 주소로 바꿔서 다시 제출해 달라고 했다. 일반 계좌, 저축 계좌, 신용카드, 직불카드까지 모두 한 번에 만들어 주었다.

바보 같은 Lloyds를 상대하느라 시간도 버리고 화도 났지만 가장 짜증났던 일은 은행 계좌가 없어 12월 월급을 받지 못한 것이었다. 다행히 현금이 조금 있어 버틸 수 있었지만, 현금이 부족했다면 큰 곤란을 겪을 뻔했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으니 Lloyds에서 만든 계좌는 심지어 매월 수수료를 지불해야 한단다. 그런 거지 같은 계좌는 만들지 못한 게 차라리 잘 됐다는 생각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