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운 3

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나, 마침내 찾아낸, 컴퓨터가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

불운 3

회사에 있는데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았더니 집에 도둑이 들었다, 침실 앞에 칼이 있었다고 소리를 질렀다. 아내를 진정시키고 자초지정을 물었다. 다행히 도둑은 떠난 뒤였다. 999로 전화해 경찰에 신고했다. 바로 집으로 떠나려 했지만, 상담원이 계속 질문을 해서 출발할 수 없었다.

통화가 끝난 후 바로 사무실을 나왔다. 집에 도착해보니 침실이 엉망이었다. 경찰관이 이미 다녀갔고, 증거를 수집하기 위해 다른 경찰관이 올 때까지 현장을 그대로 놔 두라고 했단다. 도둑은 부엌 창문을 뜯고 들어왔다. 맥이 풀린 채 거실에 앉아 경찰관이 오기를 기다렸다.

도둑은 아이들 돌 반지와 금팔지 등 귀중품과 현금, DSLR 카메라, 랩탑을 가져갔다. 방을 정리해봐야 뭘 더 가져갔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언듯 보니 내 오카리나도 보이지 않았다. 아내의 악기 상자는 파손되긴 했지만, 다행히 악기는 그대로 두고 갔다.

1시간 쯤 지난 후에 경찰관이 도착했다. 혹시 범인의 지문을 채취할 수 있을까 기대를 했지만 허사였다. 경찰은 범인의 장갑 자국을 찾아냈을 뿐이었다. 혹시 범인이 장갑 낀 손으로 얼굴을 만진 후 다른 물건에 손을 댔다면 DNA를 채취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큰 기대는 말라고 했다.

경찰이 돌아간 후 방을 정리했다. 도둑맞은 것도 짜증났고 도둑이 어질러놓은 방을 정리해야 하는 것도 짜증났다. 도둑은 여유있게도 반지 상자에서 반지를 하나씩 꺼내갔다. 상자들은 그대로 놓아둔 채. 방 앞에는 칼이 놓여 있었다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아내가 올라갔다가 큰 일이 났을지도 모는다 생각하니 치가 떨렸다.

다음 날, 도둑이 잠겨 있던 부엌 창문을 어떻게 열었을 지 궁금해 밖에 나가 살펴보았다. 창 틀은 알루미늄 샤시였다. 도둑은 창틀 틈으로 드라이버를 쑤셔넣어 안쪽 손잡이를 밀어서 돌린 다음 문을 연 것 같다. 뒷 마당 바깥도 둘러 보았다. 이쪽 길은 밖에서 보이지 않는 데다 담을 넘기도 너무 쉬워 보였다.

오후에 형사 두 명이 찾아왔다. 이것 저것 질문을 잔득 하고 내게 서류에 서명해 달라고 했다. 범인을 잡기도 어렵고 도둑맞은 물건을 되찾기도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요즘 한인을 상대로 한 절도 범죄가 늘고 있다고, 한인 집에 돌반지 같은 금이 있는 것을 아는 것 같다고 했다.

한국에서 아파트에 살 때는 집에 도둑이 들 거란 생각도 안 했다. 여기서도 설마 우리 집에 도둑이 들까 생각했다. 바로 이틀 전에 옆 집에 도둑이 들었다. 그때도 '옆 집을 털었으니 바로 옆 우리집을 털러 오지는 않겠지' 하고 안이하게 생각했다. 옆 집을 턴 도둑과 우리 집을 턴 도둑이 같은 도둑인지는 모르겠지만.

도둑이 들었다는 소식이 이웃에게도 들어갔나보다. 이웃들이 집을 방문해 위로해 주었다. 옆 집 브라이언과는 알고 지냈지만 다른 이웃과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인사하게 되었다. 길 건너편에 사는 아주머니도 집에 방문해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하라고 했다.

전직 경찰이었던 영어 선생님 말이, 이런 도둑들은 항상 쉬운 목표를 찾는단다. 그리고 한 번 털었던 집에 다시 오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제대로 고쳤는지 확인하러. 이런 말을 우리 집에 방문했던 형사들에게 했더니 아니라고, 이미 다 털어갔으니 다시 안 온다고 한다.

어느 말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도둑이 언제든 다시 와서 같은 방법으로 집 안에 들어올 수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불편했다. 더군다나 조만간 혼자 한국에 다녀와야 하는데, 집에 아내와 아이들만 남겨놓을 생각을 하니 더욱 불안했다. 부랴부랴 아마존에서 경보장치를 구입해 설치했다.

집에 경보장치가 설치되어 있으면 도둑은 위험을 감수하는 대신 다른 쉬운 목표로 이동한다고 한다. 일리 있는 말이다. 그래서 다들 경보장치를 잘 보이는 곳에 달아 놓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한국 아파트 시스템과 달리 무단 침입 감지 시 경보는 울리지만 경찰을 불러주지는 않는다.

아내는 감시 카메라도 설치하고 싶어한다. 마음에 드는 제품을 찾았지만 배터리로 동작하는 모델은 아직 출시가 안 되었다. 전원을 직접 연결해야 하는 모델을 살 수도 있지만, 미국 제품이라 전압이 맞는지도 확실하지 않고 설치하려면 벽에 구멍을 뚫어야 하기 때문에 포기했다.

아마존에서 검색해보니 가짜 감시 카메라도 많이 있었다. 그렇지만 들리는 말에 의하면, 도둑놈들은 감시 카메라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금방 알아본다고 한다. 가만히 모양을 살펴보니 가짜 감시 카메라에는 어떤 공통점이 보였다. 진짜처럼 보이려고 너무 애쓴 흔적. 젠장! 내가 봐도 알겠다.

오늘 존이 와서 집을 둘러보고 부엌 창틀을 손봐주었다. 그러나 도둑이 다시 오면 같은 방법으로 다시 열 수 있다. 존은 내일 와서 담장 위에 철조망을 쳐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가짜 감시 카메라도 설치하면 어떻겠냐고 했다. 도둑들은 가짜 감시 카메라를 쉽게 알아볼 것이라 했더니 존도 수긍하는 것 같았다.

도둑에게 털리고 나니, 자기도 털렸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영국에는 도둑이 많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알려준 사람은 없었다. 그 사람들도 그런 일이 자기들한테만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최근 이런 사건이 많은지 여기 저기 주의하라는 플랭카드가 붙어 있다.

한 주 전쯤에는 아내가 집 앞에서 열쇠 꾸러미를 잃어버렸다. 열쇠 꾸러미에는 자동차 키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내 말이, 열쇠를 현관에 꽂아놓고 그냥 들어왔는데 누가 가져간 것 같다고 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나중에 돌아와 자동차를 바로 가져갈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때 자동차의 예전 키를 무효화했지만 현관 자물쇠는 아직 그대로다. 현관 자물쇠를 바꾸기도 전에 도둑이 창을 뜯고 들어온 것이다. 아무튼 현관 자물쇠도 빨리 바꿔야 겠다. 태연하게 현관 문을 열고 들어와서 또 털어갈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이젠 경보 장치가 있으니 경보가 울리겠지만.

허탈하다. 점심도 도시락 싸 가며, 냉장식품 같은 거 사먹으며 단 돈 몇 파운드라도 아끼려고 아둥바둥 했건만, 이렇게 한 방에 수 천 파운드가 날라갔다. 올해는 유난히 안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났l지만, 불운 1, 불운 2, 이사에서 겪은 일은 이 사건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