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ndbox의 뜻
프로그래밍 또는 보안 관련 책을 읽다 보면 종종 '모래상자'란 용어가 나온다. 'sandbox'를 '모래상자'로 번역한 것이다. '모래상자'란 단어를 보면 어떤 그림이 떠오르는가? 'sandbox'를 직역하면 '모래상자'가 맞긴 하지만, 나는 이렇게 번역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먼저 sandbox의 정확한 뜻을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영어 단어의 뜻을 정확하게 파악하려면 영영사전을 찾아보는 것이 좋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Longman Dictionary of Contemporary English을 찾아보니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sand‧box /ˈsændbɒks $ -bɑːks/ noun [countable] American English
a small box filled with sand for children to play in
Longman 사전에는 '아이들이 안에서 놀 수 있도록 모래를 채워 놓은 작은 상자'란 뜻 하나만 나와 있다. Oxford Dictionary of English를 찾아보면 좀더 다양한 뜻이 나와 있다.
sandbox |ˈsan(d)bɒks| noun
- a box containing sand, especially one kept on a train to hold sand for sprinkling on to slippery rails.
- historical a perforated container for sprinkling sand on to wet ink in order to dry it.
- North American a children's sandpit.
- Computing a virtual space in which new or untested software or coding can be run securely.
- (also sandbox tree) a tropical American tree whose seed cases were formerly used to hold sand for blotting ink.
영국에서는 '아이들이 놀 수 있도록 모래를 채워 놓은 작은 상자'를 sandpit이라 한다. Oxford 사전은 영국 영어 사전이라 sandpit의 북미식 표현이라고만 기술해 놓았다. 우리가 찾는 뜻은 두 번째 뜻 '새 소프트웨어 또는 테스트되지 않은 코드를 안전하게 실행할 수 있는 가상공간'이다.
영한 사전을 찾아보면 '(어린이가 안에서 노는) 모래 놀이통', '(어린이 놀이용) 모래 상자' 등의 뜻이 보인다. 뜻 풀이에 '(어린이가 안에서 노는)', '(어린이 놀이용)'을 덧붙인 이유는 뜻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모래통' 또는 '모래상자'라고만 하면 다른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다.
요즘은 많이 보지 못했지만, 예전에는 눈이 오는 경우를 대비해 오르막길 도로 옆에 모래를 담아 놓는 상자가 있었다. 눈이 오면 오르막 길 또는 내리막 길에서 자동차가 미끄러지지 않도록 모래 상자에서 모래를 퍼다 길에 뿌린다. '모래상자'란 단어를 봤을 때 내게 제일 먼저 떠오는 이미지는 이것이었다. 화재 발생 시 모래로 불을 끄는 데 사용하는 '방화사'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다.
애초에 '새 소프트웨어 또는 테스트되지 않은 코드를 안전하게 실행할 수 있는 가상공간'을 표현하는 용어로 sandbox란 단어를 사용한 이유가 뭘까? sandbox 안에서 아이들은 마음껏 모래를 가지고 놀 수 있지만, 모래가 상자 밖으로 아무렇게나 어질러 지지는 않는다. 확인되지 않은 코드를 마음껏 돌려볼 수 있지만 컴퓨팅 환경 전체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도록 실행 영역을 제한하는 것, sandbox의 개념과 일맥상통한다.
그런 의미에서 sandbox를 단순히 '모래상자'로 직역하는 것이 적절한가? 몇 가지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다.
- 전문용어를 번역하면 혼동될 뿐이다. 그냥 '샌드박스'라고 하는 게 낫다.
- 언어는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니다. '모래상자'를 sandbox를 나타내는 개념으로 확장할 수 있다.
- sandbox의 뜻을 더 잘 나타내는 단어를 찾는다. '모래 놀이통' 또는 간단히 '놀이터' 정도면 어떨까?
1번 의견을 지지하는 사람도 꽤 있을 것이다. 국립국어원에서 기술 용어나 영어를 우리말로 순화해 발표했을 때 조롱하는 사람들을 많은 걸 보면 알 수 있다. 기술 서적이나 문서를 번역할 때 널리 사용되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영어로 된 기술 용어를 우리말로 순화하려는 노력은 계속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래상자'란 표현이 원래 우리말에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언어의 어휘가 항상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므로, 전문가들이 모여 용어를 정리하고 지침 같은 것을 만들어 노력한다면 2번 의견도 틀렸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반발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업계에서 널리 사용된다면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모래상자'에서는 번역 냄새가 난다. '모래상자'란 말을 들으면 다른 이미지가 떠오른다.
나는 '모래상자' 보다 '놀이터'로 번역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확인되지 않은 코드를 제한된 환경 안에서 마음껏 갖고 놀 수 있는 '놀이터'가 더 적절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