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운 4
1월 말 교통사고가 났다. 아내는 큰 아이 학교 데려다 주고 오는 길이었다. 아내의 설명에 따르면 사고 당시 상황은 다음과 같다.
흰색 밴이 앞에 가고 있었다. 밴이 멈추길래 아내도 차를 멈췄다. 그런데 갑자기 밴이 뒤로 오기 시작했다. 아내는 3초 이상 경적을 눌렀지만 밴은 계속 뒤로 와서 우리 차를 들이받았다. 충돌 후 밴 운전자는 차를 앞으로 뺀 다음 내려서는 아내에게 화를 냈다. 그 운전자는 밴을 길 옆에 주차하려 했는데 뒤를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아내는 사고 현장 사진을 찍었다. 그러고는 보험처리 할꺼냐 묻고는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사과도 없이 가버렸다.
전화로 사고 상황을 듣고 나서 경찰서에 전화해 교통사고를 보고했다. 경찰은 다친 사람이 없으면 보험사에 전화하라고 안내했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다. 우리 차 앞 범퍼가 조금 깨졌다. 100% 상대 과실이 분명하므로 보험처리하면 될 거라 생각했다. 보험사에 전화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보험사는 클레멘츠 월드와이드였는데, 알고보니 보험 브로커였고 실제 보험사는 따로 있었다. 상담원에게 한참을 설명했는데 내 말을 잘 못알아 듣더니 보험사인 ERS로 직접 통화하라고 했다.
ERS로 전화해 안 되는 영어로 겨우겨우 설명을 했는데, 보험사에 주소 변경 통보를 안 한게 문제가 되었다. 보험은 작년 초에 들었는데 여름에 이사한 후 주소를 갱신하지 않았다. 사실 클레멘츠에 전화해 주소를 갱신하려 했었는데 수수료 50 파운드를 요구해 그만두었다. 그땐 자동차 사고가 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보험 만료 직전에 사고가 난 것이다. ERS 상담원은 클레멘츠에 연락해 보험처리가 되는지 확인해보겠다고 했다.
다음 날, 그 다음날, 다음 다음날에도 ERS에 전화해 경과를 물었지만 계속 기다리라고 했다. 결국 거의 두 주가 지나서야 보험 처리 허가가 떨어졌다고 편지가 왔다. 편지봉투 안에는 보고서 양식이 있었다. 양식을 채워 스캔해 메일로 보냈다. ERS는 다시 엔터프라이즈라는 회사에 보험 처리를 맡겼다. 클레멘츠나 ERS와 달리 엔터프라이즈는 매일 저녁 내게 전화해 '상대 보험사에 연락을 했는데 아직 응답이 없다', '상대 보험사가 운전자에게 연락하는 중이다' 같은 식으로 경과를 알려주었다.
영어 선생님에게도 교통사고 이야기를 했다. 영어 선생님은 경찰관 출신인데, 내 설명을 듣더니 상대 운전자가 책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 사실 나도 그 부분을 걱정했다. 목격자도 확보하지 못했고, 아내가 찍은 사진으로는 상대 운전자 과실을 증명하기가 어려워 보였다. 자기 과실을 인정하고 사과하기는 커냥 적반하장으로 아내에게 화를 냈다는 점을 고려하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았다. 영어 선생님은 아직 모르니 너무 걱정하지는 말라고 위로해 주었다.
아니나다를까, 엔터프라이즈로부터 연락이 왔는데 상대 운전자가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했다. 엔터프라이즈에서는 더 이상 진행할 수 없으므로 ERS에 연락해 어떻게 할지 상담하라고 했다. ERS에 연락했지만 거기라고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상대를 고소할 수는 있지만 결과가 어떻게 될 지는 알 수 없다고, 과실이 50:50으로 나올 수도 있다고 했다. 클레임을 걸었는데 우리 과실도 인정되면 다음 보험료가 인상될 수 있다.
영어 선생님에게 상황을 설명했더니, 우선 수리에 비용이 얼마나 드는지 알아보고, 클레임을 할 경우 그게 새 보험의 보험료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본 후 비용대비 효과가 큰 쪽으로 선택하라고 조언해 주었다. 듣고 보니 옳은 말이었다. 새 보험사에 전화해 클레임을 걸 경우 보험료가 얼마나 영향을 받을 지 문의하자, 클레임이 어떻게 처리되느냐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알 수 없다고 한다.
아직 자동차 수리에 비용이 얼마나 드는지는 알아보지도 않았다. 아마 수리하면 몇 백 파운드 깨질 것이다. 클레임을 하면 비과실 사고가 아닌 이상 부담금을 내야 한다. 그게 250 파운드였는지 350 파운드였는지 확실히 생각나지 않는다. 그리고 무사고 기록도 끝나기 때문에 보험료가 늘어난다. 그냥 넘어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앞 범퍼가 조금 깨진 정도다. 큰 사고가 아니어서, 다친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라 생각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사고 후에 대시캠을 사서 달았다. 대시캠을 미리 설치했더라면 상대 운전자가 발뺌을 못했을 텐데 하는 때늦은 후회가 들었다. 작년에 집에 도둑이 든 다음 알람을 설치했다. 올해는 차 사고가 난 다음 대시캠을 설치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의 전형이 아닌가. 하지만, 비슷한 사건 사고가 반복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필요한 조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