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선생님
영국에 와 팀에 합류했을 때 영어로 의사소통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꼈다. 특히 영국 사람들이 하는 말을 알아 듣기 힘들었다. 팀 동료가 내 어려움을 알아채고는 회사에서 지원 방법이 있는지 알아보겠다고 했다. 그리고 매니저가 영어 회화 강좌를 들을 수 있게 해 주었다.
처음에는 회사에 누를 끼치는 것 같아 '내가 좀더 노력해보고 안 되면 요청하겠다'고 답했다. 매니저는 '네가 빨리 영어에 익숙해져서 팀에 기여하는 것이 회사에 더 큰 도움이 된다'고 답했다. 일과 시간 중에 영어 수업을 해도 괜찮다고 했지만 업무에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아침 일찍으로 시간을 잡았다.
그렇게 영어 회화 수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영어 선생님은 전직 경찰 출신의 나이가 지긋한 신사분이었다. 처음에는 진도 나가는 데 집중했지만 나중에는 영국 생활에 대한 팁 등 다양한 주제로 잡담을 나누었다. 영어뿐 아니라 영국에 적응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총 72회의 수업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일주일에 두 번 영어 수업을 하다가 나중에 일주일에 한 번으로 바꾸었다. 일주일에 두 번 수업하는 게 힘들기도 했고, 이 영어 수업을 더 오래 지속하고 싶었다. 또, 회사일이나 개인 사정으로, 영어 선생님 휴가로 수업을 연기하고 하다보니 영어 수업이 2년 가까이 지속되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마땅히 물어볼 데가 없어 영어 선생님에게 조언을 부탁했다. 이사 업체와 문제가 생겼을 때, 집에 도둑을 들었을 때, 아내가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도 영어 선생님과 상담했다. 영어 시간이 아니라 인생 상담 시간이었던 셈이다. 그때마다 선생님은 "너는 나 없으면 어떻게 살려고 하냐? 나중에 상담료를 청구해야 겠다"고 잔소리를 하곤 했다.
내가 뉴몰든, 우스터파크에서 집을 알아본다고 하자, '거긴 너무 비싸고 삶의 질을 높이기 힘들다, 차차리 우리 동네로 이사와라, 내가 집을 내놨는데 네가 내 집을 사면 되겠다'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마음에 드는 집을 찾아 거의 계약 직전까지 갔다가 하자를 발견해 포기했는데, 그 때도 영어 선생님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내가 영어 선생님에게 도움을 준 적도 있다. 영어 선생님이 아마존에서 모니터를 주문했는데 배송되기 직전에 모니터 가격이 내렸다. 영어 선생님이 아마존에 차액을 보상해줄 수 없냐고 물었지만 이미 출고되어 배송을 취소할 수 없으니 반품하고 다시 주문하라고 하더란다. 반품하려면 30 파운드 가량의 배송료를 부담해야 하기 때문에 배보다 배꼽이 커지는 상황이었지만 아마존 상담원은 복지부동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마존 리더십 원칙 중 하나인 Customer Obsession을 알려주며, 그런 식의 응대는 리더십 원칙에 어긋나기 때문에 상담원의 매니저와 이야기해보라고 했다. 그 다음 수업 때 영어 선생님이 활짝 웃으며 내 덕에 잘 해결되었다고, 고맙다고 했다. 항상 도움만 받다 도움을 주어 나도 기뻤다.
지난 크리스마스 때는 내게 선물과 친필 카드까지 보내주었다. 나도 간단한 선물을 보내긴 했지만 카드까지 보낼 생각은 못 했다. 카드를 받고 나서야 '아차' 했지만 너무 늦었다. 영어 선생님은 내가 보낸 인삼차를 케이크와 함께 마셔봐야 겠다며 좋아했다. 올 해에는 꼭 카드도 보내야 겠다.
지난 3월에 영어 수업이 끝났다. 영어 선생님에게 "영어 수업 끝나고 나면 도움을 부탁할 데가 없으니, 앞으로 영국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푸념했더니 영어 선생님이 "걱정하지 말고 언제든 연락해라, 나는 너를 친구로 여기고 있다" 답했다. 너무 고마워 울컥 했다.
이사 가서 집 정리가 끝나면 초대해도 되겠냐고 했더니 흔쾌히 수락했다. 너무 멀어서 미안하고 조심스럽다 했더니, 아니라며 아내와 함께 가도 되겠냐고 물었다. 지금은 루튼(Luton)이란 곳에 사는데 아마 내가 새 집으로 이사갈 때쯤 영어 선생님도 러들로(Ludlow)라는 더 먼 곳으로 이사를 갈 듯 하다.
루튼에서 내가 이사갈 집 까지는 운전하면 1시간 조금 넘게 걸리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2시간 조금 넘게 걸린다. 가깝지는 않지만 먼 거리도 아니다. 그러나 러들로는 얘기가 다르다. 자동차로는 3시간 넘게 걸리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4시간 넘게 걸린다. 이건 정말 큰 마음을 먹어야 움직일 수 있는 거리다.
영어 선생님에게 이메일로 몇 주간의 소식을 전했더니 답장이 왔다. '언젠가 너와 다시 영어 수업을 하면 좋겠다, 나도 너와 영어 수업 하는 게 즐거웠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건 좋은 일이다...' 정말 한 번 볼 수 있으면 좋겠다. 나도 나중에 가족과 함께 러들로로 놀러가 영어 선생님을 보면 좋을 것 같다. 그래야 정말 친구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