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나, 마침내 찾아낸, 컴퓨터가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

글쓰기

학창 시절, 방학을 맞는 것은 신나는 일이었지만, 방학 숙제로 빠지지 않고 나오는 글짓기 숙제는 정말 싫었다. 방학 초기에는 정신 없이 놀기 바빠 숙제는 안중에 없었다. 방학 중간 쯤 되면 슬슬 글짓기 숙제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하지만 아직 여유가 있다고 생각하며 미루었다. 개학이 며칠 남지 않은 시점이 돼서야 부랴부랴 숙제를 시작하려 하지만 싫어 하던 게 갑자기 잘 될리 없다. 독후감의 경우에는 더 대책이 없었다. 책도 읽지 않았으니.

신기했던 점은, 그렇게 하기 싫어 미루고 미뤘던 글짓기 숙제가 일단 첫 단락을 쓰고 나면 술술 써졌다는 것이다. 보통 '200자 원고지 10장 또는 15장 내외' 같은 식으로 일정 분량을 채워야 했는데, 첫 단락을 써냈다면 비교적 순조롭게 분량을 채울 수 있었다. 책을 읽지 않았어도 독후감을 쓸 수 있었다. 제목, 서문, 차례를 참고해 그럴싸한 독후감을 쓸 수 있었다. 심지어 이렇게 써낸 가짜 독후감으로 상을 받기도 있다. 그러나 그 첫 문장을 쓰기가 어려웠다.

중학교 때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숙제로 내는 일기 말고 내가 쓰고 싶어서 쓰는 일기. 그때는 꿈도 컸고 감수성도 풍부했다. 중학교 입학 선물로 받은 만연필로 일기를 썼다. 나는 만연필로 글씨를 쓰는 것이 무척 좋았다. 일기 쓰는 시간이 즐거웠다. 그러던 어느 날, 부모님이 내 일기를 몰래 읽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너무 화가 나서 몇 년 동안 썼던 일기장을 모두 찢어서 태워버리고 다시는 일기를 쓰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대학에 들어가 일기 쓰기를 다시 시작했다. 역시 만연필로 썼다. 만연필은 한번 획을 잘못 그으면 고칠 수가 없다. 일기장이 지저분해지는 것을 원치 않아 잘못 적은 글씨를 그대로 활용하면서 문장을 고치곤 했는데, 한동안 그런 식으로 문장을 바꾸는 것을 나름 즐겼던 것 같다. 그렇게 10년 넘게 일기를 썼는데, 문득 내가 특정 패턴을 반복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반성조로 글을 쓰는 경우가 많았는데, 행동은 바뀌지 않았다. 그걸 또 반성하고... 그게 지겨워 일기 쓰기를 그만 두었다.

학부 때는 거의 매주 실험 리포트를 써야 했다. 실험 데이터를 정리하고 분석해 결론을 도출하는 과정이 재미있었다. 대학원 때는 논문을 써야 했다. 석사 논문의 수준은 뻔하겠지만, 적어도 학부 리포트와 비교할 수준은 아니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그 효용성을 입증하기 위해, 관련 논문을 읽고 다른 논문에 없는 아이디어를 제시해 기존 연구와 비교하고 내 아이디어가 어떤 점을 개선하는지 설명해야 했다.

내 글 수준은 대단하지 않지만, 리포트, 논문, 일기를 썼던 경험이 글쓰기에 도움이 된 것은 분명하다. 나중에 책을 여러 권 번역했고 직접 책을 쓰기도 했다. 프로그래밍 서적이 대부분 그렇듯 내 책도 시대에 뒤떨어져 쓸모 없는 내용이 되었지만, 한 동안 잘 팔려 3판까지 출간했다. 출판사 요청을 받아들여 계속 갱신했다면 좀더 오래 우려먹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번역한 책도, 지금 보면 민망한 부분이 많지만, 크게 욕을 먹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이젠 일기 대신 블로그를 쓴다. 일기와 달리 블로그는 공개된다. 방문자가 많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이 본다. 처음에는 누가 보든 말든 내가 쓰고 싶은 것을 썼다. 그러나 가끔씩, 블로그를 읽고 댓글을 남겨주는 독자를 보면서 독자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블로그에 올릴 글을 쓸 때는 시작이 더 어렵다. 첫 단락을 넘기면, 그럭저럭 풀어나갈 수 있다. '시작이 반이다'는 내가 글을 쓸 때 딱 들어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 시작이 힘들다.

'나중에'라는 말은 내게 치명적이다. 좋은 주제가 떠올랐을 때 가능한 빨리 글쓰기를 시작하는 게 좋다. 어떻게든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 그래야 글을 완성할 가능성이 커진다. '나중에 시간 날 때 써야지' 했다가 제대로 마무리한 글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메모장에서 차마 지우지 못했지만 그 주제로 글을 쓸 확률은 거의 없는 그런 글감이 수십 가지다. 메모를 보며 지난 기억을 돌려 보려 하지만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의 그 상태로는 돌아갈 수 없다.

글쓰기를 잘 하려면 글쓰기 근육을 길러야 한다. 글쓰기 근육을 기르려면 많이 읽고 꾸준히 써야 한다. 올해 읽은 첫 책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에 나오는 말이다. 처음 읽었을 때는 별로라 생각했는데, 두 번을 읽으니 훌륭한 책이란 생각이 든다. 한동안 책도 많이 못 읽고 글도 많이 못 썼다. 글쓰기 근육이 많이 약해졌다. 다시 책 읽는 시간 글 쓰는 시간을 늘리려 한다. 한 주 만에 책을 두 권 읽었고 블로그에도 이 글을 포함해 두 개나 썼다. 나쁘지 않은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