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득신고

일을 미루는 것은 내 오랜 습관이다. 이번 소득신고 사건 역시 내 오랜 습관의 연장선에 있다. 영국의 과세연도는 매년 4월 6일부터 그 다음해 4월 5일까지다. 온라인 소득신고 마감일은 해당 과세 연도의 다음해 1월 말이다. 종합소득세 신고를 5월 한 달 동안 마쳐야 하는 한국에 비하면 신고 기간이 상당히 여유있게 주어졌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은 눈 깜박할 사이 지나가 버린다. '아직 여유 있으니 천천히 하지' 생각하고 계속 미루다보니 1월달이 되었다. 버스 정류장 광고판에 소득신고를 하지 않으면 벌금을 내야 하니 마감일 전에 소득신고를 마치라고 하는 광고가 보였지만, '아직 시간이 있군' 하고 미루었다. 이렇게 계속 미룬 이유는, 내가 처한 특별한 상황 때문에 소득신고가 간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월 중순,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소득신고를 하다가 혹시 시간 걸리는 일이 생기면 망할 수 있으니 미리 하자는 마음으로 HMRC 웹사이트에 들어가 소득신고를 시도했다. 그런데..., 온라인 소득신고를 하려면 세금 계정을 활성화해야 하고 활성화 코드는 우편으로 보내준단다. 허걱!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 발생했다. 활성화 코드를 받는 데는 7영업일이 걸린단다. 그래, 7일 안에 받으면 아직 괜찮다.

그런데 활성화 코드가 1월 말이 되도록 도착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예전 주소로 보낸게 아닌가 의심되었다. 활성화 코드를 요청한 직후 주소가 예전 집으로 되어 있는게 보여 바로 새 주소로 업데이드 했는데, 활성화 코드는 그냥 예전 주소로 간 것 같았다. 웹사이트에 들어가 다시 활성화 코드를 요청하려 했지만 활성화 코드를 다시 요청하는 메뉴를 찾지 못해 포기했다.

그 와중에 아내가 자동차 사고를 당했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다. 온 정신이 자동차 사고 수습에 팔려 소득 신고는 까맣게 잊었다. 솔직히 아주 잊은 건 아니었지만 너무 정신이 없었다. 자동차 사고 문제가 어느 정도 정리되고 나서도 소득신고에 신경쓰지 못했다. 아니, 신경쓰기가 싫었다. 그냥 아무일 없기만 바랬다고 하는게 맞겠다.

3월 초에 작년 소득신고를 도와주었던 딜로이트 세무사에게서 메일이 왔다. 기한 내 소득신고를 안 해서 벌금 100파운드를 내야 하고 빨리 소득신고를 하라는 내용이었다. HMRC에 전화를 걸어 온라인 소득신고 방법을 문의했다. 그러나 계정이 활성화되어 있지 않아 진행할 수 없었다. 다시 활성화 코드를 요청했다. 통화가 끝난 후 바로 벌금을 납부했다. 또 활성화 코드를 받으려면 다시 7일을 기다려야 했다.

마침내 활성화 코드를 받아 계정을 활성화하고 소득신고를 하려다 그만 막혀버렸다. 나는 한국에 약간의 소득이 있고 세금을 줄이기 위해 송금 기반 과세(remittance basis)를 선택해야 하는 데 이 경우는 HMRC 웹사이트에서 온라인으로 소득신고를 할 수 없고 서드파티 소프트웨어를 사용해야 한단다. 사용 가능한 서드파티 소프트웨어 목록을 보여주긴 했지만 어느 걸 써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딜로이트에 연락해 소득신고를 도와줄 수 없냐고 물었더니 자기네는 기꺼이 도와주고 싶지만 개인 소득신고를 도와주는 경우 수수료가 최소 3,000파운드라 많이 비싸니 자기네 회사에서 일했던 다른 세무사를 소개해주겠다고 했다. 그쪽에 연락을 했더니 딜로이트보다 많이 싸긴 했지만 여전히 600파운드(부가세를 포함하면 700파운드 이상)라는 적지 않은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영어 선생님에게 조언을 구했더니 잘 아는 세무사가 있다고 소개해주었다. 그리고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딜로이트가 소득신고를 도와주게 할 수 없을지 회사에 문의했다. 영어 선생님이 소개해준 세무사는 200파운드 정도의 수수료를 요구했다. 많이 싸졌다. 그러나 내 특수한 사정을 제대로 처리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천만 다행으로 회사에서 딜로이트가 내 소득신고를 도와주는 것은 승인했다.

4월 초에 딜로이트 세무사를 만나 상담했다. 상담하며 영국은 세율이 너무 높아 세금내고 월세 내고 나면 남는게 없다고 투덜거렸더니 자기도 그렇단다. 필요 서류를 모두 작성해 보냈다. 한 시름 덜었다. 요즘 가뜩이나 쪼들리는데 벌금을 100파운드나 내서 속이 쓰렸다. 딜로이트에서는 지난 과세연도 소득신고도 해주었으니 이번에도 잘 해줄 거라 생각했다.

4월 말 소득신고가 끝났다. 세금 894파운드 더 내야 한다고 해서 바로 납부했다. 혹시나 싶어 HMRC에 확인 전화 걸었다. 모든게 잘 처리된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런데 HMRC 상담원이 내가 세금을 4,400파운드 더 내야 한다고 했다. 으악! 순간 너무 당황해 어버버 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내 월급에서 세금이 꼬박꼬박 빠져나가기 때문에 그럴리가 없다, 다시 확인해달라고 요청했다.

상담원이 잠시 확인해보겠다고 했다. 몇분 후에 약간 착오가 있었던 것 같다며 세무사가 소득신고 폼을 제출할 때 잘못 입력한 항목이 있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세금도 모두 납부되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혹시나 싶어 활성화 코드 관련 이야기를 하며 벌금도 어떻게 안 되겠냐고 했더니 이해한다며 벌금마저 취소해주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고맙다고, "Thank you very much"를 몇 번이나 말했는지 모르겠다.

해당 내용을 문서로 받을 수 있는지 문의했더니 편지로 보내주겠단다. 지난 몇 달동안 내 마음을 짓누르던 문제가 해결되었다. 세금을 추가로 894파운드나 더 내야 했지만 선방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벌금 100파운드도 취소되지 않았는가. 그런데 그날 저녁 HMRC로부터 메일이 왔다. 편지로 보낸다더니 메일로 보냈나 싶었다. 메일을 보니 자세한 내용은 HMRC 웹사이트에 가서 확인하란다.

가뿐한 마음으로 HMRC 웹사이트에 들어가 메시지를 보고는 기겁하고 말았다. '으악!' 내가 세금을 4,400파운드 더 내야 할 뿐 아니라 이걸 기한 안에 내지 않았기 때문에 벌금 220파운드를 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HMRC에 전화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확인 결과 HMRC에서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것 같단다. 세금은 모두 납부했고 벌금도 모두 취소해주었다.

다음날 HMRC로부터 편지가 왔다. 모든 게 다 정리됐다는 편지가 벌써 왔나? 기대하며 편지 봉투를 뜯었다. 편지를 읽어보니 여전히 4,400파운드 세금을 납부하지 않았다는 내용이었다. 아...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도대체 언제 끝날 것인가? 편지 날짜를 보니 내가 HMRC에 전화걸기 전이다. 그러나 확실히 하기 위해 다시 HMRC에 전화를 걸어 확인했다. 다행히 편지는 무시해도 된다고 한다.

HMRC는 막강한 조직이라 관료적일 줄 알았는데, 전화 상담에 매우 친절했다. 내가 영어를 잘 못하는 데도 친절하게 설명해주었고, 벌금도 취소해 주었다. 사실 벌금 취소까지는 기대하지 않았다. 상담원이 해결됐다고 했는데 벌금 내라는 메시지가 오고, 다시 전화해 모든 게 해결됐다고 했는데 세금 더 내란 편지가 온 것은 짜증났지만, 상담원은 친절히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마침내 HMRC로부터 세금 정산 내역을 받았다. 벌금은 취소되었고 미납 세금도 없다는 내용이었다. 내가 납부했던 894파운드가 다시 환불된다고 하는 게 이상하긴 했지만, 따지고 싶지 않다. 적지 않은 금액을 환불해 준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아직 환불 금액이 내 통장에 입금되지는 않았지만 이제 안심해도 될 것 같다. 그리고 이번엔 정말 소득신고를 미리미리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