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 뚫기

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나, 마침내 찾아낸, 컴퓨터가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

구멍 뚫기

집을 사서 이사오고 나서 전동 드릴을 장만했다. 한국에서는 드릴을 사용해본 적이 없는데 여기서는 드릴을 쓸 일이 자주 생겼다. 벽에 구멍을 뚫는다든가 가구를 조립할 때 드릴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 인건비는 비싸고 내 수입은 적기 때문에 웬만한 작업은 내가 직접 해야 한다. 드릴로 구멍을 뚫는 게 쉬워 보이지만 막상 해보면 만만한 작업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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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장만한 드릴을 사용한 첫 작업은 다이슨 청소기 홀더 설치였다. 예전 집에 알람을 설치할 때 드릴을 사용해보긴 했지만 그땐 외벽이었다. 옆집 할아버지에게 드릴을 빌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2층(영국식으로는 1층) 벽에 구멍을 뚫고 알람을 설치했다. 벽이 얼마나 단단했는지 구멍 두 개 뚫는데 두 시간은 걸렸던 것 같다.

이번에는 방 안 벽에 구멍을 뚫어야 했다. 벽에 구멍을 두 개 뚫고 플러그럴 넣은 다음 청소기 홀더를 나사로 고정하면 되는 단순한 작업이었다. 드릴칼 상자에는 여러 종류의 드릴칼이 있었다. 검은 색으로 된 드릴칼, 드릴칼 끝에 뾰족한 침이 나와있는 드릴칼, 그리고 은색으로 된 드릴칼이 있었는데 어떤 것을 사용해야 할지 몰랐다. 벽에 큰 구멍을 내고 싶지 않아 지름 2mm 짜리 검은색 드릴칼을 골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처구니 없다. 어떻게 지름 2mm 구멍에 지름 5mm짜리 플러그를 넣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까? 깨끗하게 새로 페인트를 칠한 벽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는 점은 이해하지만, 구멍은 청소기 홀더로 가려지므로 크기에 집착할 필요는 없었다. 깔끔하게 구멍을 뚫어야 한다는 강박에 비해 드릴 사용 경험은 부족했다.

구멍을 뚫다가 드릴칼이 부러졌다. '이런! 너무 가느다란 드릴칼을 썼나보다.' 생각하고는 좀더 두꺼운 지름 3mm짜리 드릴칼을 골랐다. 다행히 부러진 2mm짜리 드릴칼은 구멍 밖으로 빠졌다. '진작 이걸롤 할껄' 생각하는 순간 드릴칼이 또 부러졌다. 젠장! 이번에는 드릴칼 깊히 박혀 빠지지도 않았다.

지름 4mm 드릴칼로 다시 시도했다. 안쪽에 깊히 박힌 부러진 드릴칼 때문인지 드릴이 들어가지 않았다. 힘든 작업이 아니었지만 얼굴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겨우 구멍을 두 개 뚫어 청소기 홀더를 고정시키려 하는데 홀더 구멍과 내가 뚫은 구멍이 딱 맞지 않았다. 구멍 지름이 너무 작아 플러그가 들어가지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것을 억지로 우겨넣었다.

벽에 구멍 두 개 뚫는데 두 시간도 넘게 작업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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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이나 쇠스랑, 전지 가위 같은 정원 관리용 도구를 넣어둘 셰드를 샀다. 조립 서비스를 받으려면 적지 않은 비용이 들기 때문에 직접 조립하기로 했다. 셰드 벽면과 기둥, 지붕 등을 이어붙이고 나사로 조여야 하는데, 나무게 꽤 단단하기 때문에 설명서에서는 드릴로 지름 3mm의 가이드 구멍을 뚫은 다음 작업하라고 되어 있었다.

나무가 단단해봐야 쇠를 이길 수는 없다. 드릴로 구멍을 뚫는 것은 쉬웠다. 다만 3mm 드릴칼은 지난 번 작업때 부러졌기 때문에 쓸 수가 없었다. 지름 4mm로 구멍을 뚫으면 나사가 너무 헐거워 힘을 못 받을 수 있으므로 그냥 2mm 구멍을 뚫어서 작업하기도 했다.

그런데 나무가 정말 단단했다. 이미 뚫린 구멍으로 나사못을 박아넣는데도 힘이 많이 들었다. 처음에는 드릴에 드라이버 심을 꽂아 작업했는데, 나사못 머리가 망가지기 일수였다. 할 수 없이 손으로 드라이버로 직접 돌렸는데, 정말 어깨가 빠질 정도로 힘을 써야 했다.

덕분에 설명서에 한 두 시간이면 된다는 작업을 열 시간도 넘게 했다. 3mm 드릴칼이 있었다면 작업이 훨씬 쉬웠을 것이다.

3

아내가 거실 벽에 시계를 달고 싶어했다. 실내 벽에 다시 구멍을 뚫고 싶지는 않았지만, 아내가 원하니 어쩔 수 없었다. 이번에는 지난번과 다른 시도를 해보기로 했다. 플러그 지름을 자로 재서 5mm인 것을 확인하고, 정확히 지름 5mm 드릴칼로 벽에 구멍을 뚫었다. 거실 벽은 예상 외로 쉽게 뚫렸다.

플러그를 넣으니 쏙 들어갔다. 드라이버로 나사못을 넣고 시계를 달았다. 벽에 구멍도 깨끗하게 뚫렸고 플러그도 깔끔하게 들어갔다. 아아, 이렇게 하는 거구나. 다른 곳도 5mm 드릴칼을 썼으면 쉬웠을 것을... 그랬으면 애꿋은 드릴칼을 부더뜨리지 않았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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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실에 거울을 달아야 했다. 원래는 세면대 위에 거울로 된 수납장이 있었는데, 세면대를 쓸때마다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수납장을 떼어 옆으로 옮기니 세면대를 쓰기가 훨씬 편해졌지만, 원래 수납장이 있던 자리가 휑 해졌다. 거기에는 어차피 거울이 있어야 했다.

아내가 아마존에서 거울을 샀지만 나는 거울을 다는 것을 계속 미뤘다. 거울을 달아야 하는 자리는 플래스터 보드로 되어 있었다. 플래스터 보드에 드릴로 구멍을 뚫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거울 무게를 견딜 만큼 튼튼하게 고리를 다는 방법을 몰라 방법을 알아내는 데 시간이 걸렸다.

플래스터 보드에 구멍을 뚫고 일반 플러그를 꽂아서 나사못으로 고정시키면 나사못이 충분한 힘을 받지 못한다. 거울은 무게가 꽤 되기 때문에, 플래스터 보드 구멍 부분이 깨지기라도 하면... 대형 사고가 될 것이다. 따라서 플래스터 보드에 무거운 것을 달려면 특수한 고리 같은 것을 사용했야 한다.

드릴로 뚫은 구멍에 고리를 넣고 나사를 조이면 플래스터 보드 뒤에서 고리가 팽창해 다시 구멍 밖으로 나올 수 없게 되는 구조다. 구글에서 plasterboard fixings 또는 wall anchors로 검색하면 다양한 형태의 고리를 볼 수 있다.

일단 고리를 준비되니 나머지는 순조로웠다. 이 작업에서 중요한 건 정확성이었다. 거울이 정확히 가운데 똑바로 달리도록 구멍을 뚫어야 했다. 줄자로 위치를 정확히 표시해 드릴로 구멍을 뚫고 고리를 설치한 다음 거울을 걸았다. 혹시 삐뚤어지면 어쪄나 걱정했지만 거울이 예쁘게 잘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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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복도 벽에 옷걸이를 달고 싶다고 했다. 막대 형으로 생긴 옷걸이로 벽에 수평으로 설치해야 한다. 수평으로 구멍 세 개를 뚫어야 했다. 역시 벽에 구멍 낼 위치를 정확히 표시하는 게 제일 어려운 일이었다. 지름 5mm 드릴칼로 벽에 구멍을 뚫었다.

드릴로 벽에 구멍을 뚫으면 바닥에 시멘트 가루가 잔득 떨어짔다. 진공청소기로 시멘트 가루를 치우고 구멍에 플러그를 꽂았다. 옷걸이를 구멍에 맞추고 나사못으로 고정시키는데, 구멍이 빡빡했는지 드라이버로 나사못을 돌리는 게 매우 힘들었다. 이제 벽에 구멍 뚫는 것도 익숙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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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온지 1년이 다 되도록 커튼도 없이 살았다. 커튼을 할까 블라인드를 할까 고민하면서 시간을 보내다 마침내 커튼할 곳과 블라이드 할 곳을 정했다. 그리고 인터넷으로 블라인드를 주문했다. 블라인드를 설치할 창의 크기를 정확히 재서 주문해야 하고, 설치 역시 내가 직접 해야 했다.

블라인트를 다섯 개 설치해야 했다. 하루에 다 하기 힘들어 며칠에 나누어 작업했다. 드릴로 여러 곳에 구멍을 내다 보니 드릴이 쉽게 들어가는 곳이 있는가 하면 드릴이 잘 안 들어가는 곳도 있었다. 겉으로 보면 똑같은 벽이기 때문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여지껏 벽에 구멍을 뚫을 때 검은색 드릴칼을 사용했는데, 많이 사용해서 날이 무뎌져서 그런지 구엉이 잘 뚫리지 않았다. 드릴칼 상자에 있는 은색 드릴칼을 써보기로 했다. 그런데 은색 드릴칼로 구멍을 뚫으니 구멍이 너무 쉽게 뚫리는 것 아닌가! 알고봤더니 은색 드릴칼이 벽돌이나 시멘트 벽에 사용하는 것이었고, 검은색 드릴칼은 나무에 사용하는 것이었다.

젠장! 이걸 몰라서 그동안 벽에 구멍을 뚫을 때 쓸데없이 힘을 많이 써야 했고 드릴칼마져 모두 닳아서 못쓰게 되어버렸다.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을 한다더니 딱 그 꼴 아닌가. 아무튼 은색 드릴칼로 벽에 쉽게 구멍을 뚫을 수 있게 되어 블라인드 작업도 생각보다 빨리 마무리할 수 있었다.

블라인드 하나당 구멍을 구멍을 여섯 개를 뚫어야 했고 블라인드를 다섯 개 설치했으니까 벽에 서른 개의 구멍을 뚫었다. 이 정도면 벽에 구멍뚫는 일도 많이 익숙해졌다 할 수 있겠다. 자신감이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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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에서 가든으로 나가는 문과 아이들 방에는 커튼을 달기로 했다. 아마존에서 커튼레일은 플라스틱으로 되어 있어 쇠톱으로 창문 크기에 딱 맞게 자를 수 있었다. 거실부터 작업하기로 했다. 여기는 구멍을 세 개 뚫어 커튼레일을 고정하기로 했다. 먼저 오른쪽에 하나... 가뿐하게 뚫었다. 이 정도 쯤이야...

이젠 왼쪽에 하나 둟어볼까. 드릴칼이 한 3cm 정도 들어가더니 더 이상 들어가지 않고 헛돌았다. 커튼 레일을 튼튼하게 고정하려면 5cm 정도는 뚫어야 하는데... 아무리 힘을 주어도 구멍을 더 깊게 만들 수 없었다. 이건 뭐지? 혹시 벽 속에 자갈이나 철근 같은게 있나? 혹시나 싶어 위치를 조금 바꿔 뚫어 보지만 마찬가지였다.

아, 망했다. 구멍난 곳은 필러로 막으면 되지만... 커튼 레인은 다 잘라놔서 반품할 수도 없고... 정말 구멍내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인가? 작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싶어 빌더에게 전화로 물어봤지만 내가 예상한 것 이상의 답은 나오지 않았다.

구멍 뚫는 위치를 바꾸기 위해 커튼레일을 다른 형식으로 바꿔볼까도 생각해 봤지만 여의치 않았다. 이미 구입한 커튼레일이 아깝기도 했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5cm 깊이가 안 되면 3cm 깊이의 구멍을 두 개 뚤기로 했다. 나사못이 충분히 깊이 들어가지 못하는 대신 개수를 늘려 보강하는 것이다.

다행히 커튼레일 설치가 잘 되었다. 커튼이 아주 무거운 건 아니니 충분히 견딜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 방에서는 구멍이 쉽게 뚫렸다. 커튼 레일을 달며 구멍을 열 개 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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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에 카메라가 달린 초인종을 설치해야 했다. 문에 초인종을 설치할 수는 없고, 문 양쪽은 유리도 되어 있어 문과 유리 사이의 문틀에 초인종을 설치해야 했다. 문틀은 uPVC로 되어 있으니 구멍을 내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2mm 드릴칼로 구멍을 뚫고 나사못으로 초인종을 고정하면 된다.

왼쪽은 구멍이 잘 뚫렸는데 오른쪽에 드릴이 들어가다 막혔다. 문틀 안에 쇠로 된 부분이 있나? 초인종 상자에 있는 나사못 길이만큼은 드릴이 들어가줘야 하는데... 초인종과 함께 산 보안 카메라 상자를 살펴보니 길이가 조금 짧은 나사못이 보였다. 그래, 나사못을 바꿔 사용하면 해결되겠군.

이렇게 입구에 초인종을 달았다. 깔끔하게 잘 단 것 같다.

9

입 앞쪽에 보안 카메라를 달아야 했다. 보안 카메라가 집 앞마당을 볼 수 있게 달아야 하고 사람 손이 닺지 않게 충분히 높게 달아야 한다. 지붕 아래쪽 벽에 달려고 생각했는데 가만 보니 벽에 나무로 된 부분이 있었다. 그래, 시멘트 벽보다는 나무로 된 부분에 카메라를 설치하는데 더 쉽겠다.

그런데 그 위치에 작업을 하려면 사다리가 필요했다. 에휴, 사다리를 사야 겠구나... 이렇게 사다리가 준비될 때까지는 작업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사다리를 사려고 아마존에서 검색도 해보고 B&Q에 가서 보기도 했는데 가격도 만만치 않았고 어떤 게 좋은지 알 수 없었다.

일요일 오후 집 밖에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리길래 뭔가 하고 나가봤더니, 옆집 스티븐이 옆옆집 할아버지, 할머니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도 안면이 있는 사이라 슬며시 이야기에 끼어들었는데, 알고보니 집안 물건을 정리하는 데 쓸만한 물건 중 불필요한 것을 나눠주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득템했다고 좋아했다.

스티븐이 내게도 마음에 드는게 있냐고 하길래 창고를 둘러보는데 사다리가 보였다. "어, 마침 사다리 사려고 했는데" 하고 말했더니 필요하면 가져가란다. 우리집이 벙갈로임을 고려하면 그렇게 큰 사다리는 필요 없긴 했지만, 일단 챙겼다. 할아버지가 사다리 나르는 것을 도와주셨다.

이제 사다리가 준비됐으니 보안 카메라를 달 수 있다. 사다리를 벽에 기댄 후 드릴를 들고 사다리를 올라갔다. 나무에 구멍을 뚫는 것은 쉬운 일이다. 초인종을 달 때 나사못이 너무 길어 카메라 고정용과 바꿨는데, 나무에 카메라를 고정할 때는 오히려 긴 나사못이 더 적절해 보였다.

역시 2mm 드릴칼로 구멍을 뚫고 나사못으로 카메라를 고정시켰다. 이 위치까지 전기 선을 끌어올 수 없어 배터리로 동작하는 카메라를 샀는데, 배터리를 교체할 때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갈 생각을 하니 조금 갑갑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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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도 옷걸이 하나를 벽에 더 달았고, 신장을 조립할 때도 드릴이 필요했다. 집에 드릴이 있어서인지 모르겠지만 드릴을 쓸 일이 계속 생긴다. 드릴 사용에 많이 익숙해졌지만 벽에 구멍을 뚫는 일은 여전히 스트레스다. 벽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이번에는 쉽게 될지 뚫어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