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형 인간

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나, 마침내 찾아낸, 컴퓨터가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

아침형 인간

제 경험상 아침형 인간과 저녁형 인간의 유일한 차이점은,
일찍 일어나는 사람들이 단지 지나치게 우쭐댄다는 정도입니다.
- 러셀 포스터

한동안 '아침형 인간'이 유행했다. 성공한 사람은 아침에 일찍 일어난다든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사람이 더 건강하다든가 하는 말이 정말 맞는지는 모르겠다. 저녁 늦게 또는 밤 늦게 일하는 게 효율적인 사람도 많을 테고, 잠만 충분히 잔다면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난다고 해서 건강하지 못하란 법도 없을 것 같다.

사람마다 자기에게 맞는 생활 패턴이 있을 것이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기,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기,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기 등을 경험해 본 결과,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이 내게 가장 잘 맞는 패턴인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하는 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 늦은 시간에는 '회사에서 종일 힘들게 일했으니 좀 쉬자'는 생각이 든다. 결국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는 대신 바둑을 두거나 트위터, 유튜브 등을 보며 시간을 낭비하게 된다.
  • 아침 일찍 시간에는 바둑을 두거나 유튜브나 트위터를 보지 않는다. '일찍 일어났는데 그런 걸 하며 시간을 버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 아침 일찍 출근해서 일찍 퇴근하면 출퇴근 시간이 줄어들고 기차나 지하철에도 사람이 덜 붐빈다. 출퇴근에 드는 시간과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다.
  • 아내도 일찍 퇴근해서 저녁 시간에 도와주는 것을 좋아한다. 아침에 아이들 밥먹이고 등교시키는 것은 혼자 할 수 있지만 저녁에는 피곤하니 내가 일찍 오면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 같은 시간을 자도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면 잠을 더 잘 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가령 9시쯤 자서 5시에 일어나면 상쾌하지만 새벽 1시에 자서 아침 9시에 일어나면 참을 충분히 잤음에도 몸이 안 좋다.

한때 잠을 줄여 공부할 시간을 확보할 요량으로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기도 시도 했다. 잠이 충분하지 않으면 집중이 잘 안 된다. 책만 보면 눈이 감겨 나이가 들어 그런가 했는데, 잠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었다. 잠을 충분히 하면 책을 봐도 졸립지 않다. 한창 때에는 억지로 버텼지만 지금은 체력이 안 된다.

밤에 뭔가 해보려고 늦게까지 깨어 있어도 생산적인 일을 한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명확한 목표가 있지 않으면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럴 바에는 그냥 일찍 자는 게 낫다. 내게는 밤 시간의 마음가짐과 새벽의 마음가짐에 큰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나는 아침에 일찍 출근하는 것이 좋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사무실에 있으면 집중이 잘 된다. 그러나 지난 1년 동안 몹시 게을러져 출근을 늦게 했다. 지금 살고 있는 곳은 출퇴근이 별로 편하지 않은데다, 밤 늦게까지 쓸데없이 시간을 보내다 늦게 잠드는 경우가 많아졌다. 자연히 아침에도 늦게 일어났고 출근도 늦어졌다.

최근 팀을 옮긴 후 다시 아침에 일찍 출근하기 시작했다. 새벽 5시에 알람이 울리면 일어나야 겠지만, 정신을 차리는 데 5분에서 20분 정도 시간이 든다. 씻고 도시락을 준비해 집을 나서 5시 43분 기차나 6시 13분 기차를 타고 출근하면 7시쯤 회사에 도착할 수 있다.

출근하는 사람이 많은 오전 7, 8시에는 기차도 매우 붐비는데다 기차가 밀리기도 한다. 워털루 역까지 30분 정도 걸릴 것이 이 시간에는 40분, 50분, 어떨 때는 1시간 넘게 걸리기도 한다. 피크타임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늦게 출근하기도 했다. 8시 반이 넘으면 사람들이 조금 줄어들지만 출근 시간은 줄어들지 않는다.

일찍 출근했으니 특별한 일이 없으면 퇴근도 일찍한다. 지금 팀 매니저는 4시에서 4시 반 사이에 퇴근하는데, 나도 매니저가 퇴근할 때 함께 퇴근한다. 나는 매니저보다 항상 일찍 와서 일을 시작하니 퇴근을 같이 한다고 눈치볼 필요는 없다. 그리고 여기서는 출퇴근 시간으로 압박하지는 않는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려면 밤에 일찍 자야 한다. 적어도 밤 10시에는 잠들어야 아침 5시에 일어날 때 피곤하지 않다. 그런데 이걸 지키는 게 생각보다 어렵다. 특히 금요일, 토요일 밤이 그렇다. 한 주를 힘들게 보냈으니 주말에 영화 한 편 보는 건 괜찮겠지 하는 생각이 든다. 이게 주중 생활 패턴을 망치지 않으면 괜찮을 것 같다.

이렇게 몇 주를 보내고 나니 마음이 조금 편해진 것 같다. 뭔가를 해야 하는 데 아무것도 못 했다는 죄책감이 줄어들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우쭐대지는 않지만, 마음 한 구석에 자존감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니 영국에 온 후로 자존감이 너무 낮아졌다.

기상 시간을 새벽 3시로 당겨보고 싶다. 그러면 출근 전에 집에서 나만의 조용한 시간을 두 시간 이상 가질 수 있게 된다. 그 시간에 바둑, 트위터, 유튜브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공부를 할 수 있다. 그러려면 8시에 잠자리에 들어야 할텐데 타당해보이지 않는다.

글을 쓰고 보니 내 시간을 낭비하게 만드는 게 뭔지 명확해졌다. 트위터, 유튜브, 바둑. 특히 바둑은 내 인생의 적이라 할 만 하다. 최근에는 유튜브에도 만만치 않게 시간을 버리고 있다. 분명한 것은 저녁 보다는 아침에 내가 이런 유혹에 잘 버틴다는 점이다. 유혹에 취약한 시간에 잠을 자면 시간 낭비를 최소화 할 수 있다.

요즘은 4시 반이면 해가 지고 오후 5시면 깜깜해진다. 저녁 7, 8시만 돼도 밤 늦은 시간 같은 느낌이 들어 일찍 자러 가게 된다. 밤 10시는 돼야 깜깜해지는 여름에는 어떨까? 밖이 훤해 아이들도 일찍 안 자려고 고집을 피우는 그때도 지금 같은 패턴을 유지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