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들로
영어 수업이 끝난 다음에도 영어 선생님과 가끔씩 연락을 주고 받는다. 크리스마스에는 카드와 선물을 교환한다. 선생님은 전화로 얘기하자고 하지만 나는 메일을 선호한다. 영어로 듣고 말하는 것보다는 읽고 쓰는 쪽이 부담이 덜하다. 그러던 어느 날 영어 선생님이 남는 방 하나를 에어비앤비로 쓴다는 소식을 들었다.
준비
그동안 러들로까지 가는 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거리도 멀고 선생님께 민폐를 끼치지 않을까 걱정도 되었다. 그러나 선생님이 에어비앤비를 한다니, 방을 예약하고 놀러가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께 물었더니, "에어비앤비는 걱정하지 마라, 너와 네 가족이 친구와 손님으로 왔으면 좋겠다"는 답이 왔다.
아내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자기도 좋단다. 너무 오래 머물면 불편을 끼치지 않을까, 아이들도 시골 동네에서 심심해하지 않을까 걱정에 2박3일로 일정을 잡아 영어 선생님께 알려드리고, 러들로에서 할만한 게 뭐가 있을까 인터넷으로 알아봤다. 아내는 여전히 아이들 심심해할까 걱정이다.
선생님 댁에는 오후 5시쯤 도착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쉬지 않고 운전하면 3시간 반 정도 걸릴텐데, 아이들이 지루해 할 것 같고 나도 힘들 것이다. 알아보니 우리 집과 러들로 사이에 코츠월드란 관광지가 있다. 중간에 그곳에 들려 조금 놀다 가면 좋을 것 같았다.
아내는 빈손으로 가면 안 된다며 선물을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영국인 집을 방문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 어떤 선물이 좋을지 몰랐다. 마땅히 생각나는 게 없어 차를 선물하면 어떨까 했는데, 아내는 차 하나만 선물하긴 약하다고 하며, 여러 종류의 한국 차와 함께 방향제를 준비했다.
아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영국 사람들 집 방문할 때 방향제 선물하면 좋아 하단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아주 좋은(비싼) 방향제를 준비했다. 또 사모님께는 꽃을 선물하면 좋아할 거라고 했다. 꽃은 미리 사둘 수 없으니 가는 길에 사 가기로 했다.
내가 선생님께 민폐를 끼치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 만큼이나 선생님도 우리 가족에게 대접이 부족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 같았다. 메일로 몇 번 씩이나 어떤 걸 먹고 싶은지, 아이들은 어떤 걸 좋아하는지 물어왔다. 아무거나 다 잘 먹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답했다.
1일
시간이 흘러 러들로로 가는 날이 되었다. 아침에 출발하되 중간에 코츠월드에서 좀 쉬다가 선생님 댁에는 오후 5시쯤 도착하는 걸 목표로 잡았다. 아내는 중간에 먹을 도시락을 준비하느라 바빴다. 나는 둘째 아이를 데리고 GP에 다녀왔다. 의사가 소변 검사를 원했지만 오늘 휴가를 떠난다고 하니 돌아와서 해도 된다고 했다.
원래 오전 9시쯤 나서려 했는데 이런저런 일이 생겨 출발이 계속 지연됐다. 마침내 출발 시간, 짐을 모두 차에 싣고 구글 맵에 목적지를 Cotswold
로 설정하고 출발했다. 출발하기 정말 힘들다. 동네를 벗어나 A3로, 다시 M25로 갈아탔다. M25부터 차가 엄청 밀렸다.
차가 안 밀렸으면 두 시간 걸릴 거리를 거의 세시간 넘게 운전해 코츠월드에 도착했다. 그런데 도착한 곳은 어느 이름 모를 농장 한 가운데. '으악! 망했다!' 알고보니 코츠월드는 상당히 넓은 지역이고 구글 맵은 그냥 코츠월드 가운데로 안내한 것이었다. 아내가 그런 것도 몰랐냐며 마구 짜증을 냈다.
늦게 출발했기 때문에 오후 5시까지 러들로에 도착하려면 코츠월드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은 30분 정도에 불과했다. 게다가 구글맵에서 뭘 어떻게 검색해야 좋을지도 몰랐다. 아내가 계속 짜증을 내서 나도 짜증이 났다. 그냥 러들로로 출발하고 코츠월드는 오는 길에 들르기로 했다.
중간에 어느 동네에서 꽃집이 보여 차를 멈추고 꽃다발을 샀다. 조금 더 가니 클리 언덕(Clee hill)이란 곳이 나왔다. 경치가 무척 좋아 아이들과 잠깐 차에서 내려 사진을 찍고 경치를 감상했다. 아내는 화가 안 풀렸는지 차에서 나오고 싶어하지 않았다. 이럴땐 건드리지 않는 게 상책이다.
마침내 러들로에 있는 영어 선생님 댁에 도착했다. 초인종을 누르자 영어 선생님과 사모님이 우리를 반갑게 맞았다. 에어비앤비로 쓰는 방은 하나인데, 우리 가족을 위해 방 두 개를 내어주셨다. 집도 조용한 곳에 위치해 있었고, 방도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짐을 방에 들여놓은 후 정원에서 테이블에 함께 와인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선생님 댁에는 록시란 개가 있었는데, 아이들은 금방 록시와 친해졌다. 아내와 나는 선생님 내외와 테이블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아이들은 록시와 노느라 정신이 없었다.
얼마 후, 사모님은 저녁 준비를 하러 들어가셨고 아내도 사모님을 도우러 따라갔다. 선생님은 나를 정원 구석에 있는 서머하우스로 안내했다. 안락의자에 편안히 앉아 와인을 마시며 정원을 감상하는 것도 색다른 기분이었다. 평소 술을 마시지 않는데, 와인을 몇 잔이나 마셔서 알딸딸 했다.
구석에 앉아 정원을 바라보면 다른 관점에서 정원을 볼 수 있다고 선생님이 설명했다. 오전에 차 한잔 들고 와서 서머하우스에 편히 앉아 햇볕을 쬐며 여유를 즐기거나 사모님과 함께 와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낮잠을 잘 때 활용하기도 한단다. 그제서야 쓸모없어 보였던 서머하우스 용도를 이해했다.
저녁이 준비되었다. 모두들 맛있게 식사를 즐겼다. 둘째 아이가 매운 맛에 너무 예민해 조금 불평했던 것만 빼면. 식사 후 조금 쉬다가 아이들을 재우러 침실로 올라왔다. 더 놀고 싶다고 투덜거렸지만 금새 잠들었다. 아내도 피곤했는지 아이들과 함께 잠들었다.
거실로 내려왔더니 선생님과 사모님이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 날 뭘 할지 설명해주셨고, 선생님이 직접 안내해주겠다고 했다.
2일
전날 와인을 많이 마셔서였는지 긴 운전 때문에 피곤해서였는지 아침에 일찍 일어날 수 없었다. 첫째 아이는 아침 일찍 일어나 록시와 놀겠다고 나갔다. 너무 시끄럽게 하면 안 된다고 주의를 주었다. 아내와 둘째 아이도 계속 자고 있었다. 멀리서 첫째 아이가 사모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를 들으며 다시 누웠다.
아침 식사는 빵이었다. 아이들은 시리얼을 먹었다. 여러 종류의 잼이 있었는데 러들로에서 만든 것이란다. 사모님이 아침 일찍 첫째 아이와 록시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는데 아주 즐거운 시간이었다고 이야기해주었다. 출발 전 일기예보와 달리 아주 화창한 날씨였다. 식사 후 차를 타고 러들로 시내로 향했다.
처음 간 곳은 러들로 성이 잘 내려다 보이는 곳이었다. 혼자 갔더라면 커피 한 잔 들고 벤치에 앉아 여유를 부리며 경치를 감상하고 싶을만한 곳이었지만, 아이들은 벌써 지겹다고 빨리 가자고 난리다. 먹구름이 몰려와 햇빛을 가렸고 바람도 불어 조금 쌀쌀했기에 오래 있기는 힘들었다. 에효, 내 팔자야...
다시 러들로 시내로 돌아와 차를 주차장에 세운후 나왔다. 러들로 시장도 볼거리지만 안타깝게도 화요일은 시장이 쉬는 날이었다. 선생님을 따라 러들로 성을 돌아 언덕 아내로 내려가며 오래된 건물을 보았다. 어떤 건물은 거의 800년 전에 지어진 것도 있었다.
언덕을 내려온 곳은 팀 강(River Teme)가였다. 선생님이 이것저것 설명을 해주었는데, 아이들 챙기느라 정신이 없어 건성으로 들어 그런지 기억에 남는 것이 없다. 옛날에 강물을 끌어 물레방아를 돌렸다는 이야기만 희미하게 생각날 뿐이다. 강가에 멋진 레스토랑이 있었고, 선생님이 여기서 점심을 먹는 것도 괜찮을 거라 했다.
다시 언덕을 올라와 한 성당에 들어갔다. 지금 구글맵으로 찾아보니 우리가 방문했던 곳은 성 로렌스 교회(St Laurence's)로 800년 전에 지어진 유서깊은 곳이다. 구석에 아이들이 색칠할 수 있도록 그림과 색연필이 있었다. 아이들이 색칠에 정신이 팔려있는 동안 아내는 교회 안을 둘러보았다.
선생님께 고마워 식사라도 대접할 생각으로 점심을 같이 하자 했더니, 선생님도 사모님도 다른 일이 있어 안 된다고 하셨다. 식사 후 러들로 성을 둘러본 후 다시 만나기로 하고 선생님과 헤어졌다. 교회 안에서 좀 쉬며 시간을 보낸 후 점심을 먹으러 아까 그 강가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점심을 먹은 후, 러들로 성으로 향했다. 러들로 성(Ludlow castle)도 거의 900년 전에 지어진 역사가 깊은 성이다. 날씨가 다시 좋아졌다. 햇빛은 쨍쨍했지만 덥지는 않았다. 아이들과 성 이곳 저곳을 둘러보고 탑 위로도 올라갔다. 무서워 했지만 곡데기까지 잘 올라갔다.
러들로 성을 둘러본 뒤 팜샵에서 영어선생님과 다시 만나기로 했다. 팜샵에서 약간의 시식도 하고 러들로에서 만든 잼도 샀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 파라솔이 꽂혀있는 테이블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이들은 아이스크림을 먹고 바로 옆에 있는 놀이터에서 놀았다.
선생님 댁으로 돌아와 저녁 식사 후, 와인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선생님과 사모님이 가족 이야기, 미국 LA에 갔을 때 노래방에 갔던 이야기 등을 해주었다. 휴대폰으로 오래된 팝송을 틀어놓고 함께 노래를 불렀다. 선생님이 갑자기 '강남스타일' 노래를 틀어 모두들 손을 흔들고 말춤을 추며 신나게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 와중에 둘째 아이가 말벌에 손가락을 쏘였다. 응급처치로 연고를 바르고 얼음으로 손가락을 차갑게 했는데, 처음에는 괜찮은 듯 하다가 통증이 점점 심해져 울었다. 선생님에게 근처에 병원이 있는지 물었더니 저녁 시간이라 GP는 모두 닫았고 가장 가까운 큰 병원이 차로 40분 거리에 있다고 한다.
집에 항히스타민제가 있긴 했는데, 어린이에게 먹이지 말라고 씌어 있었다. 급한 마음에 NHS에 전화했지만 질문만 잔득 하더니 30분 내로 의사가 전화할 거라고만 했다. 그러나 1시간, 2시간이 지나도록 의사에게 전화가 오지 않았다. 그동안 아이를 겨우 진정시켜 재웠다.
선생님은 말벌에 쏘인 경우 앨러지 반응이 있을 경우 위험할 수도 있기 때문에 자기 같으면 당장 아이를 병원에 데리고 가겠다고 했다.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갈 차비를 하는데, 아내가 괜찮을 것 같다고 말했다. 어쨌든 잠들었고 호흡곤란 같은 위험징후도 보이지 않았다.
선생님도 혹시 아이들용 항히스타민제를 구할 수 있을지 테스코에 가봤지만 구할 수 없었다. 그렇게 정신 없이 저녁 시간이 지나갔다. 아이들 재우고 거실로 내려와 선생님께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방으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피곤하고 졸린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한참을 뒤척이다 겨우 잠들었다.
거의 밤 12시쯤에 전화가 울렸다. 마침내 의사에게 전화가 온 것이다. 처음 NHS에 전화했을 때와 똑같은 질문을 했다. 다시 아이 상태를 확인하고, 아이는 괜찮은 것 같다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렇게 늦게 전화를 해 잠을 깨워 짜증이 났지만, 그 의사도 늦은 시간까지 일하느라 수고가 많음을 생각하고 참았다.
3일
또 늦게 일어났다. 첫째 아이는 또 일찍 일어나 록시와 나가고 싶어 했지만 비가 왔기 때문에 밖에 나가지는 못했다. 대신 거실에서 선생님과 텔레비전으로 내셔널 지오그래피를 보고 있었다. 둘째는 벌에 쏘인 곳이 약간 아프기는 했지만 견딜만 했던 모양이다. 연고를 더 발라주었다.
아침을 먹고 잠시 이야기를 나눈 후 짐을 챙겨 나왔다. 선생님 내외와 록시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섰다. 2박3일이면 충분할 줄 알았는데 막상 떠날때가 되니 조금 아쉬웠다. 3박4일로 일정을 잡을껄 그랬나? 아니다, 아쉬울 정도가 딱 적당한 기간일 것이다.
구글 맵에서 이번엔 정확히 버튼-온-더-워터(Bourton-on-the-water)를 찍고 출발했다. 두 시간 정도 운전해 도착했다. 차를 어디에 세워야 할지 몰라 헤매다 겨우 주차장을 찾았다. 하이스트리트로 나오니 비오는 날씨에도 관광객들이 꽤 많았다. 이번에는 제대로 온 것이다.
식당에 들어가 점심을 먹었다. 가격에 비해 식사가 썩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관광지임을 고려하면 나쁘지도 않았다. 식사 후 주변을 둘러보다 카페이 들어가 아내와 나는 커피를 아이들에게는 베이비치노를 주문했다. 베이비치노는 이름은 그럴싸하지만 사실 따뜻한 우유에 코코아 가루를 아주 조금 뿌린 것에 불과하다.
커피 마시는 엄마 아빠 옆에서 자기들도 베이비치노를 마신다고 아이들이 좋아한다. 그래, 이런 것도 여행의 재미 중 하나지... 그렇게 또 하루가 저물어갔다. 오는 길은 많이 막혔다. 집에는 깜깜해진 다음에야 도착했다. 첫날 구글맵에서 코츠월드 잘못 찍어 헤맨 것만 빼면 즐거운 여행이었다.
사족
러들로에서 돌아온 후 바로 감사 인사를 드리려 했는데, 계속 미루다 거의 두 주가 지난 다음에야 메일을 보냈다. 선생님은 그동안 잉글랜드 북서쪽에 있는 시하우스란 곳에 다녀왔고 선생님 부모님의 결혼 60주년 행사를 준비하느라 바쁘다고 하신다. 나보다 은퇴하신 선생님이 더 바쁜듯 하다.
마음은 선생님 내외를 우리 집에 초대하고 싶지만, 선생님 댁을 다녀온 후 생각이 바뀌었다. 거리를 생각하면 최소 1박2일의 일정으로 오셔야 할텐데, 집에 제대로된 침실이 없다. 지금 상태에서 초대를 하는 건 실례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국 사람들을 집에 초대해 바닥에서 자라고 하면 아마 당황할 것이다.
게다가 영국분을 런던근교로 초대해 뭘 어떻게 해드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선생님이 우리 가족에게 그랬던 것처럼 여기저기 안내할 정도로 이 동네를 잘 알지도 못한다. 런던에서 오랫동안 경찰관으로 근무했던 선생님이 오히려 나보다 더 잘 알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내가 용기를 내어 초대한다면, 선생님이 흔쾌히 수락하고 오실지도 모르겠다. 날씨가 좋으면 동네 공원에 가서 그늘에 돗자리 펴놓고 간단한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즐겁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나중에 때를 봐서 한번 물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