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소단

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나, 마침내 찾아낸, 컴퓨터가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

채소단

'채소단'이란 말이 실제로 있는지는 모르겠다. 영어로는 bed, raised bed, 또는 vegetable planter라고 한다. 우리 말에는 화단이란 말은 있어도 채소단이란 말은 사전에 안 나온다. 그렇지만 화단은 아니니 여기서는 그냥 채소단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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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계획은 정원 뒷쪽 공간을 정리해 텃밭을 만드는 것이었다. 텃밭을 만들어 채소를 키우고 싶다고 아내가 계속 보챘지만, 그것 말고도 신경쓸 일이 너무 많았다. 게다가 나는 일을 시작하기로 마음먹는 데 오래 걸린다.

지저분하게 자라고 있는 관목과 이름 모를 화초를 제거하는 데 2년이 걸렸다. 죽은 나무도 없애자고 아내가 노래를 불렀지만, 나무 전문가를 알아보고 일을 맏기는 데 몇 달이 더 걸렸다.

공간이 어느 정도 정리된 후 채소밭을 만들려고 둘러보다가 이쪽은 담과 건물로 둘러싸여 햇볕이 잘 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계획을 수정해 햇볕이 잘 드는 뒷뜰 오른쪽에 채소단을 만들기로 했다.

채소단을 만드는 일은 쉬워 보였다. 나무로 틀을 만들어 적당한 위치에 놓고 흙을 채우면 그만 아닌가. 몇 년 지나 틀이 부러지거나 쪼개지면 곤란하니 두꺼운 나무로 튼튼하게 만드는 게 좋겠다 생각했다.

나무를 파는 곳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20cm × 10cm × 240cm 침목 정도면 내 생각대로 채소단을 만들기에 적당해 보였다. 가격도 비싸지 않았다. 그런데 배송료가... 나무의 부피와 무게를 고려하면 배송료가 저렴할 이유는 없었다.

침목을 딱 7개 주문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나무를 주문할 때 좀더 많이 할 걸 그랬다. 나무는 있으면 여러 모로 활용할 일이 있다. 나무를 좀더 추가한다고 배송료가 많이 늘어날 것 같지는 않았다. 나중에 따로 주문하려면 또 배송료를 부담해야 한다.

처음에는 톱으로 나무를 직접 자를 생각이었지만 나무 두께를 직접 보고나니 생각이 바뀌었다. 그래, 저 두꺼운 나무를 톱질하다 내 팔이 다 나갈지도 모르겠다. 아마존에서 전동 원형 톱(circular saw)을 찾아 주문했다.

너무 비싸지 않으면서 허접하지도 않은 적절한 원형 톱을 찾는 데도 시간이 걸렸고, 원형 톱 사용 방법을 숙지하는 데도 시간이 걸렸다. 무시무시한 톱날을 보니 까딱 실수하면 큰 사고가 날 수 있어보였다.

나무 표면이 매우 거칠어 사포질이 필요했다. 역시 처음에는 그냥 손으로 열심히 사포질을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사포질을 조금 해보니 답이 나오지 않았다. 힘들 뿐 아니라 시간도 너무 오래 걸렸다.

결국 전동 샌더(random orbit sander)도 구입했다. 아주 매끈한 표면을 만들 때 특정 방향으로 결이 나지 않게 사포 궤적를 무작위로 한다는데, 채소단은 실내용 가구가 아니니 그 정도로 매끈할 필요는 없다.

전동 샌더를 사용하니 작업이 한결 쉬워졌지만, 사용할 모든 나무를 처리하는 데 사나흘은 걸린 것 같다. 이걸 손으로 할 생각을 했다니... 전동 샌더를 쓰지 않았다면 일주일이 지나도 못 끝냈을 것이고, 아마 내 팔도 맛이 갔을 것이다.

샌딩 작업 후 드디어 전동 원형 톱을 사용할 시간이 되었다. 원형 톱을 사용할 때 나무를 똑바로 자를 수 있도록 안내해 줄 쇠로 된 자(speed square)도 준비했다. 그러나 직접 해보니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나무 두께가 10cm가 넘지만 원형 톱의 최대 절단 깊이는 6.5cm. 나무를 위 아래도 두 번 잘라야 했는데, 절단면을 정확하게 맞추기가 어려웠다. 결국 약간의 차이가 생긴 부분은 샌더로 갈아내야 했다.

이제 나무를 맞춰 틀을 만들 차례다. 길이 20cm짜리 침목용 나사못으로 나무 틀을 고정했다. 나사못이 너무 길어 걱정했지만 그동안 드릴 사용 실력으로 무사히 나무를 연결시켜 단단히 고정시킬 수 있었다.

채소를 키우려면 물을 자주 줘야 하고 단 안의 흙은 축축한 상태로 유지될 것이다. 계속 물이 닿아야 하므로 몇 년 지나면 나무가 썪기 시작할 것이다. 그래서 나무 보존제(wood preserver)를 바르기로 했다.

처음에는 예전에 셰드에 칠했던 것과 같은 나무 보존제를 주문했는데, 생각해보니 그걸 식용 채소를 기르는 나무 틀에 바르는 게 적절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설명서를 자세히 읽어보니 나무가 흙에 닿거나 음식에 다으면 안 된다는 말이 적혀 있다.

반품하고 다른 제품알 알아봤다. 나무 보호 크림을 찾았는데, 이걸 바르면 크림이 나무 속에 스며들어 나무가 방수성을 갖도록 해준단다. 비가 온 후나 채소에 물을 준 후 나무 위에 물방울이 맺혀 있는 걸 보니 정말 방수가 되는 것 같다.

나무를 연결해 고정하는 데는 20cm짜리 나사못을 사용했다. 나무 두께가 10cm나 되니 이 정도 길이가 되어야 한다. 나사못이 너무 길어 실수하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그동안 드릴 작업에 익숙해져 그런지 의외로 쉽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이렇게 나무를 잘라 연결해 길이 240cm, 너비 80cm, 높이 20cm의 채소단으로 쓸 나무틀을 만들었다. 높이가 20cm라 너무 낮은 것 같다. 그러나 나무 배송료를 생각하니 다시 주문하기가 좀... 아내는 이 정도 높이면 충분하단다.

뒷뜰이 약간 경사졌기 때문에 땅을 파내 나무 틀을 놓고 수평계로 높이를 맞춰가며 작업했다. 정확히 직사각형이 되도록 만든다고 했지만 정확하게 직사각형이 아닌 모양이었다. 틀 두 개를 연달아 놓으니 약간 틈이 생겼다.

다행히 틀을 이리저리 돌려보기도 하고 뒤집어 보기도 하면서 틈이 거의 없게 맞췄다. 이렇게 작업하는 데 거의 한두 주는 걸린 것 같다. 낮에는 회사일 하고 저녁만 작업해 그렇기도 하지만, 나는 원래 많이 느리다.

어떻게 만들까 고민하고, 나무는 뭘 쓸까 고민하고, 전동 원형톱을 살까말까 고민하고, 나무 보존제 어떤걸로 해야 하나 알아보느라 시간 보내고... 모든 게 준비된 상태에서 연속으로 일했다면 한 사흘 정도면 충분하지 않았을까?

아무튼 채소단을 다 만들었을 때는 가을이었고, 채소 키우기를 시작하기에 적절한 때가 아니었다. 아무튼 땀을 뻘뻘 흘려가며 채소단을 만들었으니, 이제 아내 성화에서 벗어나 조금 쉴 수 있었다.

ItemCost
Sleepers (20cm × 10cm × 240cm)£101.85
Sleepers delivery£86.39
Circular Saw£49.99
Speed Square£9.99
Random Orbit Sander£42,95
Sanding disc pads£12.99
Sleeper Screw£16.48
Wood Protection Cream£54.99
Level£6.61
Total£382.24

채소단을 만드는 데 든 비용을 정리해 보았다. 거의 £400 가까이 들었다. 샌더는 정말 유용하게 사용했고, 앞으로도 사용할 일이 종종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원형 톱은 괜히 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톱으로 잘랐어도 됐을 것 같다.

과연 이만큼 비용을 들인 만큼 아내가 유용하게 사용할까? 내가 투자한 시간과 노력은... 그래, 아무 것도 안 하며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기 보다는, 힘들여 아내가 원하는 것을 만들었다. 결코 무의미한 일이 아닐 것이다.

비용이 이게 끝이 아니었다. 채소단 안을 채우는 컴포스트, 컴포스트와 섞어 쓰면 좋다는 배양토 등도 사야 했다. 거기다 각종 비료와 민달팽이 약까지... 결국은 아내가 말했다. 그냥 사다 먹는게 더 싸겠다고...

사실 집에서 채소를 키우는 게 돈 몇푼 절약하자고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씨 뿌려 싹을 띄우고, 잘 보살펴 키우고, 채소에 대해 이것저것 배우고, 또 수확해 먹기도 하고, 그런 재미로 하는 것 아니겠냐도 답해줬더니, 아내도 맞다고 한다.

올해 봄부터 아내가 온갖 화초를 사들였다. 물론 채소단에 여러 채소도 심었다. 깻닢, 부추, 상추, 열무, 고추까지... 벌써 열무를 수확해 열무김치도 담갔고, 부추를 따서 부추전도 해먹었고, 깻닢도 따서 쌈도 먹고 반찬도 만들었다.

아내는 재미가 들었는지 채소를 더 많이 키우고 싶단다. 아내의 열정이 얼마나 오래 갈 지는 모르겠다. 나는 일 벌이는 걸 좋아하지 않지만, 아내가 열심인 걸 보니 뒷뜰 반대편에 채소단을 하나 더 만들어야 하나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