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 이야기

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나, 마침내 찾아낸, 컴퓨터가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

여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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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처음으로 여우를 봤다. 겨울 이른 아침이었기에 아직 깜깜했다. 출근하려 기차역으로 가는 길에 화단에서 불쑥 여우가 나와서는 내 앞을 종종 걸어 사라졌다. 아무리 이른 시각이라지만 그래도 동네 한복판에 여우가 돌아다니는 게 신기하고 놀라웠다.

저녁에 동네를 산책하다보면 심심찮게 여우를 볼 수 있다. 심지어 회사 건물 앞에서도 여우를 본 적이 있다. 저녁 어둑어둑할 무렵, 회사 사람들과 모여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여우 한마리가 사람들 사이로 유유히 지나가는 것이었다. 런던 도심 한복판에 여우라니...

녀석들은 보통 어둑어둑해지면 돌아다니기 시작하지만 항상 그런것은 아니다. 한번은 주말 오전에 아이들과 산책을 하다가 여우를 보기도 했다. 멀리서 보면 귀엽지만, 조심해야 한다. 여우가 사람을 공격하는 일은 매우 드물다지만, 궁지에 몰리면 공격적으로 나올지도 모른다. 어쨌든 야생 동물이니까.

여우는 영리하고 조심성이 많다. 사람들 두려워하지 않지만 항상 일정 거리를 유지한다. 다가가도 후다닥 도망가지 않고 조금 물러날 뿐이다. 어두울 때는 차 밑이나 관목 속으로 몸을 숨기고 동정을 살핀다. 한두 번 호기심에 계속 따라가 보기도 했다. 그럴 때면 는 항상 일정 거리 이상으로 물러나 나를 관찰했다.

여우가 음식물 쓰레기통을 뒤져서 엉망으로 만들어 놓는다든지, 뒷마당에 들어와서는 신발을 물어뜯어 못쓰게 했다든지, 정원을 정리하다 구석에서 여우 집을 발견했다는 건 흔한 얘기다. 그래서 음식물 쓰레기통은 항상 꼭 닫아놔야 하고, 신발은 들여놓는 게 안전하다. 내 집 뒷마당에는 여우가 집을 지을 만한 곳은 없는 듯 하다.

아주 가끔씩 한밤중에 여우들 싸움 소리를 듣기도 한다. 귀여운 외모와 달리 싸움 소리는 조금 섬짓하다. 꼭 지옥에서 나온 악마의 소리 같다고나 할까. 눈으로 직접 확인한 건 아니지만, 나는 그게 여우들 싸움 소리였다고 확신한다. 고양이나 개 소리는 분명 아니고, 밤에 그런 싸움을 벌일 동물은 여우 뿐이다.

주변에 여우가 많고 산책할 때 자주 마주친다고 해서 여우가 내 일상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온 지 1년 정도 지나서부터였나, 여우가 뒷마당에 들어와서 똥을 싸놓기 시작했다. 처음 한두 번은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계속 반복되자 무시할 수 없었다.

여우가 어디에 똥을 싸고 돌아다니든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그게 내 집이라면 문제가 다르다. 아침마다 여우 똥을 치우는 건 여간 짜증나는 일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신발을 물어뜯어 놓고, 텃밭이나 화분을 엉망으로 만들어놓기도 했다. 대책을 세워야 했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여우 퇴치에 쓸 수 있는 여러 가지 제품이 보였다. 큰돈을 쓰고 싶지 않아 제일 저렴한 방법을 시도해보기로 했다. 화학요법인 것 같은데, 제품을 물에 타서 여우가 다닐 만한 곳에 뿌려놓으면 여우가 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처음 며칠간은 효과가 있는 듯 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다음에 시도한 것은 리펠런트(repellent)였다. 센서로 동작을 감지해 여우가 싫어하는 고주파 소리로 여우를 쫓아내는 방법이었다. 이건 효과가 좀더 오래 갔지만 완벽하지는 않았다. 햇빛으로 충전하지만 일조량이 부족한 겨울에는 방전되기가 일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우는 리펠런트의 사각지대를 찾아냈다.

리펠런트가 방전된 날이면 어김없이 여우 똥이 보였고, 리펠런트가 동작하면 사각지대에 똥을 싸 놓았다. 결국 리펠러를 하나 더 사서 사각을 없애야 했다. 하루 종일 켜 놓으면 배터리가 빨리 소모되어 밤에만 켰는데, 매일 밤 이걸 리펠런트를 켜고 아침에 끄고 하는 것이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여우가 옆집 헛간에 살림을 차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옆집은 오랫동안 비어 있었고 정원은 정글이 되어 있었기에 여우가 살림을 차리기게 제격이었다. 새 주인이 대공사를 하면서 정원을 정리하고 헛간 건물을 허물었는데 거기 여우 집이 있었던 것이다.

옆집 주인과 뒷뜰에서 정원 상태를 확인하며 이야기를 하는 데 뒷집 헛간 지붕위에 여우가 한 마리 보였다. 그동안 살던 집을 잃어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예전 집터를 쳐다보고 있는 모습이 애처로워 보였다. 그러나 그 녀석이 우리 집에 들어와 뒷뜰에 똥을 싸 놓은 녀석이었음도 분명했다.

여우에게 나쁜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다. 여우가 우리 집 뒷뜰에 똥을 싸 놓는 게 싫었을 뿐이다. 어떤 사람은 여우에게 먹이를 주기도 한다지만, 나는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다. 여우는 영리한 동물이니, 그 녀석도 분명 다른 좋은 곳에 다시 살림을 차렸을 것이다.

옆집 헛간에서 쫒겨난 후, 우리 집에 여우가 오는 일도 없어졌다. 매일 리펠런트를 켜고 끄지 않아도 된다. 요즘도 저녁에 산책을 하다 여우와 마주치곤 한다. 귀여운 모습에 가서 쓰다듬어볼까 생각도 들지만 야생동물에게 그러는 것은 현명한 짓이 아니다. 물론 여우도 내가 그렇게 가까이 가는 걸 허락할 리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