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승

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나, 마침내 찾아낸, 컴퓨터가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

환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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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초에 가족과 함께 한국에 다녀왔다. 2020년 4월에 한국 가려고 비행기표를 끊어 놓았지만 코로나 사태로 갈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한국에 갔던 게 2017년 11월이니 거의 5년 반만의 방문이다. 코로사 사태 이후 비행기 값이 많이 올랐기에, 조금이라도 값이 싼 경유 항공권을 구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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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샤바를 경유하는 항공편인데, 직항보다 백만원 넘게 비용을 줄일 수 있다. 갈 때는 두 시간 반 정도 걸려 바르샤바로 날아간 다음 공항에서 기다렸다 서울로 가기 때문에 그럭저럭 괜찮아 보였다. 올 때는 열 세시간에 거쳐 바르샤바에 도착해 공항에서 세 시간을 기다려야 하기에 힘들 것 같았다.

아내는 분명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몸이 좀 힘들어도 돈을 덜 쓰는 쪽을 선호하지만, 아내는 돈을 더 쓰더라도 몸이 편한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유로 비행기표를 예약하겠다고 했을 때 아내도 수긍하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비용이 백만원이나 더 드니 마냥 직항으로 가자고 할 수 없었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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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가을에 어머니와 동생이 런던에 왔었다. 직항으로도 15시간 정도 걸린 것 같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에 비행기가 러시아 영공을 통과하지 못한다. 구글맵에서 거리를 재보니, 러시아를 남쪽으로 우회하면 비행 거리가 2000 km 가까이 늘어나는 것 같다. 이에 따라 비행 시간도 2시간 이상 늘어난다.

생각해보니, 15시간 동안 비행기에 갇혀있는 것 보다는 경유지에 내려 잠시 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좁은 좌석에서 옴짝달싹 못하는 것 보다는 경유지에서 잠깐 바람이라도 쐬는 것이 오히려 나을지도 모르겠다. 다음 비행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지만 않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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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여파인지 내가 예약한 항공편도 일정이 계속 바뀌었다. 예약한 바르샤바-서울 항공편이 아예 취소되기도 했고, 바르샤바에 도착하기 전에 출발하는 것으로 일정이 바뀌는 등 난리가 아니었다. 그때마다 여행사에 전화를 걸어 일정을 다시 조율해야 했는데,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니었다.

처음에는 LOT 항공사에 직접 연락했다. 영국에서 7년을 살았지만 영어로 얘기하는 것은 여전히 부담스럽다. 메일이나 메신저로 얘기할 방법이 없나 찾아봤는데, 왓츠앱으로 항공사에 연락을 취할 수 있었다. 그러나 메시지를 보내고 응답을 받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질문 하나에 답을 듣는 데 하루가 걸리는 식이었다.

너무 답답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비행기표를 구매했던 여행사에 전화를 해봤다. 다행히 여행사와 연결되는 시간도 길기 않았고, 상담사와 대화도 순조로웠고, 항공권을 쉽게 바꿀 수 있었다. 이후로 항공 스케줄에 문제가 생기면 여행사에 전화해 일정을 조율했다.

그러나 마지막에 사단이 났다. 바르샤바에서 서울로 가는 항공편이 또 취소되어 다시 여행사에 전화를 걸어 다른 항공편으로 바꾸는 데, fifty라고 말한 걸 fifteen으로 잘못 알아듣는 중대한 실수를 하고 말았다. 런던-바르샤바 비행기의 바르샤바 도착 시간이 13시 50분인데, 13시 15분으로 잘못 이해한 것이다.

확인 메일을 받고는 머리가 띵해졌다. 바르샤바-서울 비행기가 15시에 출발한다. 비행기를 갈아탈 시간이 1시간 10분밖에 안 되는 것이다. 비행기 착륙 후 내리는 데만도 30분은 족히 걸릴 것이다. 공항이 얼마나 클지, 얼마나 붐빌지 전혀 알지 못한다. 보안 검색이나 출입국 심사를 거쳐야 한다면...

다시 여행사에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했더니 상담원 하는 말이, '유감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일정을 바꾸려면 수수료를 내야 한다, 혹시 기다리면 비행 일정이 또 바뀔지도 모르니 기다려보라'고 조언해 주었다. 하긴 지금까지도 몇 번이나 바뀌었으니 앞으로 또 얼마나 더 바뀔지 모를 일이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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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일이 코 앞으로 다가왔지만, 항공편 일정이 취소되지도 바뀌지도 않았다.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했는지 꿈자리까지 뒤숭숭해졌다. 1시간 10분만에 환승하는 게 가능할까? 수수료를 내더라도 스케줄을 조정하는 게 나을까? 그러나 스케줄을 바꾸는 것도 좋은 방법은 아닌 듯 보였다.

같은 항공사에서 더 일찍 출발하는 런던-바르샤바 비행기는 새벽 6시에 출발하는 것이었고, 국제선임을 감안하면 새벽 4시에는 공항에 도착해야 할테고, 그럼 새벽 3시에 아이들을 데리고 공항으로 나가야 한다는 얘기인데... 게다가 바르샤바에서 6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

바르샤바 공항 홈페이지를 찾아보니, 비솅겐(non-Schengen) 국가에서 비솅겐 국가로 가는 경우에는 보안 검사대와 출입국 심사를 모두 통과해야 한단다. 영국, 한국 모두 비솅겐 국가다. 아무리 생각해도 1시간 10분만에 환승하는 것은 가능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유럽 내 항공편은 지연되기 일수다. 지난 번 독일에 갈때도 출발이 1시간 넘게 지연되었다. 바르샤바로 갈 때 비행기가 제 시간에 출발한다는 보장은 없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검색해보니 내가 탈 비행기는 거의 매일 20~30분 늦게 출발/도착하고 있었다. 아, 정말... 이럴 거면 비행기 스케줄을 현실에 맞게 조정하든가.

바르샤바 공항에서 환승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필요할지 인터넷에서 찾아 봤지만 썩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어떤 사람은 1시간이면 충분하다 하고 어떤 사람은 빠듯하하고 하는 데 어떤 말이 맞는지 알 수 없었다. 그나마 이런 얘기도 나처럼 비솅겐 국가간 환승하는 경우가 아니었다.

바르샤바 공항에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국제전화로 폴란드 바르샤바 공항에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영어로 얘기할 수 있었다. 열심히 사정을 설명하고 1시간에 환승하는 게 가능하냐고 물었더니 그런 문자라면 항공사에 전화해 보라며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다시 항공사에 전화해 사정을 설명했다. 상담사가 조금 찾아보더니 바르샤바 공항에서 최소 환승 시간은 50분이고 나는 1시간 10으로 20분이나 더 있기 때문에 환승 시간은 충분하다고 알려주었다. 또한 바르샤바 공항은 별로 크지도 않고 복잡하지도 않기 때문에 환승에 오래 걸리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항공사에서 이렇게 설명을 해주니 조금 안심이 되었다. 그래, 항공사에서 괜찮다고 하니 괜찮은 거겠지. 연착으로 다음 비행기를 못 탄다면 그건 항공사 잘못이니 알아서 해주겠지... 마음 편하게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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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 당일, 일찌감치 공항에 도착했다. 캐리어가 총 네 개인데 이 중 하나만 수하물로 부치고 나머지는 직접 들고 탈 계획이었다. 값 싼 비행기표라서 그런지 1인당 기내용 캐리어와 작은 배낭 또는 손가방만 가지고 탈 수 있었고, 수하물을 부치려면 별도 비용을 내야 했다.

기내용 캐리어도 8 kg 무게 제한이 있었지만, 작년 말 독일 갈 때에는 기내용 캐리어 무게를 따로 검사하지 않았기에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하고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웬걸, 체크인 카운터에서 모든 캐리어의 무게를 확인해야 한다고 했다. 허거덕!

마음을 조리며 무게를 쟀더니, 젠장 캐리어 무게가 모두 8 kg을 초과했다. 식은 땀이 나기 시작했다. 당황해 어쩔줄 몰라하는 내게 카운터 직원이 수하물로 부치는 캐리어 무게는 상관하지 않을테니 무거운 걸 모두 수하물 캐리어로 옮겨서 무게를 맞춰보라고 했다.

카운터 앞에서 캐리어를 열어 짐을 이리저리 옮겼다. 대충 됐다 싶어 다시 무게를 재어 보았다. 하나는 7.6 kg, 통과. 다른 하나는 8.4 kg, 다는 하나는 9 kg... 뜨아, 수하물 캐리어에 더이상 공간이 없었다. 어떻게 해도 모두를 8 kg 이하로 만들 수는 없었다. 다행히 카운터 직원이 그 정도면 됐다고 했다. 휴...

보안 검색대를 통과하고 출국장을 지나 안으로 들어왔다. 비행기 탑승까지는 아직 시간이 좀 남아 있었고, 아침도 안 먹고 공항에 나왔기에 커피와 샌드위치로 아침을 먹었다. 캐리어 바퀴 하나가 고장난 것을 발견했다. 아마도 둘째 아이가 캐리어 위에 앉아서 그렇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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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나 다를까, 출발이 지연되고 있었다. 탑승 시간도 30분 정도 뒤로 밀렸다. 에휴, 그러면 그렇지... 바르샤바에서 한국행 비행기를 탈 수 있을까? 기다리는 줄에 한국 사람이 보였다. 자기도 딸과 함께 한국으로 가는 거라 했다. 바르샤바에서 한국행으로 갈아타는 사람이 또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조금 놓였다.

탑승 시간이 되었다. 짐이 많아 천천히 타기로 했다. 비행기표와 여권을 확인하고 들어가려 하는데 게이트 직원이 가방 무게를 재야 한다고 했다. 체크인할 때 다 쟀다고 했지만, 여기서도 다시 재야 한단다. 그리고 8 kg이 넘는 캐리어 두 개를 수하물로 부쳐야 한다고 했다.

아니, 체크인 할 때 다 통과했는데 무슨 소리냐고 따졌지만 그 직원은 강경했다. 바로 캐리어 두 개를 수하물로 보내라고 다른 직원에게 말했다. 아아, 망했다. 수하물 하나에 £50가 넘었던 것 같은데, 두 개를 수하물로 보내면 £100을 추가로 부담해야 하는 것인가!

이렇게 좌절하고 있는데 직원이 빨리 들어가라고 재촉했다. 책상에 카드 결제기가 있어 계산하라고 말할 줄 알았는데 들어가라니, 그럼 캐리어 두 개는 추가 비용 없이 수하물로 가는 것인가? 뭐 그렇다면 꼭 나쁜 일도 아니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잽싸게 비행기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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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에 앉아서도 언제 출발하나 초초하게 기다렸다. 드디어 비행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활주로로 가는 길목에서 한참을 기다렸다. 시계를 보니 여기서 30분은 기다린 것 같다. 환승 시간이 1시간 10분밖에 안 되는데, 여기서 1시간 늦게 출발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륙 후 안전벨트 등이 꺼지자 여기 저기서 승무원에게 물어보는 소리가 들렸다. 한국 가는 비행기를 탈 수 있냐는 질문인 것 같았고, 승무원은 이미 바르샤바 공항에 연락을 해 두었고 제 시간에 한국행 비행기에 탈 수 있도록 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출발은 거의 1시간이 늦었지만 도착은 원래 시간보다 30분 정도 늦은 것 같았다. 바르샤바 공항에 도착해서 비행기에서 내리니 한국행 비행기를 타려면 이쪽으로 가라고 표지를 들고 안내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보안검색이나 출입국 심사는 없었다. 통로를 지나 모퉁이를 돌았더니 한국행 비행기 탑승 게이트가 보였다.

정말 항공사 직원이 말했던 대로 바르샤바 공항은 별로 크지 않았다. 복잡하지도 않았고 북적이지도 않았다. 한국행 비행기 탑승이 이미 시작되었다. 재빨리 이동해 기다리는 줄 뒤에 붙었다. 무사히 한국행 비행기에 탔다. 자리에 앉은 후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니, 이러면 오히려 더 잘된 것 아닌가. 환승 대기 시간 없이 바로 환승한 것이다. 게다가 바르샤바에서 서울까지 10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전체 비행시간은 12시간 조금 넘는다. 이 정도면 거의 직항 수준 아닌가! 게다가 중간에 환승이 있어서 그랬는지 비행 시간이 덜 지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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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바르샤바-서울의 여정과 달리 돌아오는 길은 조금 고달팠다. 바르샤바-서울 비행시간이 10시간이었던 것과 달리 서울-바르샤바 비행은 13시간 걸렸다. 편서풍 영향이 있겠지만, 3시간씩이나 차이가 나는 것은 이해되지 않는다. 런던-서울도 갈때와 올때 1시간밖에 차이나지 않았는데.

바르샤바-서울 비행때는 내 좌석 화면이 고장나 비행 정보를 확인하지 못했지만, 서울-바르샤바 비행때는 비행 속도가 7xx km/h 정도였다. 마지막에 유럽에 와서야 8xx km/h 속도로 비행했다. 예전에 다른 비행기를 탔을 때는 900 km/h 이상으로 비행했던 것 같은데.

한국으로 갈 때와 달리 이번에는 보안검색과 출입국심사를 모두 거쳐야 했다. 원래는 이게 정상인데, 한국으로 갈 때는 시간이 촉박해서 절차를 생략한 것인가? 아무튼 비솅겐 국가에서 비솅겐 국가로 환승하는 경우는 보안검색, 출입국 심사를 모두 거쳐야 한다고 홈페이지에 쓰여있긴 했다.

게다가 바르샤바-런던 비행기가 지연되었다. 바르샤바 공항에서 기다리는 시간도 늘어났다. 따라서 인천 공항을 출발하여 런던 히드로 공항에 도착하는 데 20시간 넘게 걸렸다. 너무 힘들어서 바르샤바-런던 비행기에서는 정신없이 잤고, 집에 도착해서도 바로 쓰러졌다.

한국에서 집을 나선 것이 오전 8시쯤이고 영국에서 집에 도착한 시간이 자정(한국 시간으로는 다음 날 오전 8시)이니 집을 나서서 24시간만에 도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