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매니저, 대니

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나, 마침내 찾아낸, 컴퓨터가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

전 매니저, 대니

대니의 첫 인상은 뭔가 부시시하면서도 푸근한 아저씨 같은 느낌이었다. 항상 웃는 얼굴이고, 뭔가 허술한 것 같은데, 계속 이야기를 하다보면 기분이 좋아지고 내가 뭘 해야할지 깨닫게 한다. 신비로운 능력이다. 팀을 옮기더라도 가끔씩 대니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대니는 이전 팀 매니저다. 원래 매니저였던 마르셀이 다른 팀으로 옮긴 후, 임시로 팀을 맡았다. 얼마 후 나도 지금 팀으로 소속을 옮겼기에 함께 일했던 기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확인해보니 겨우 석 달 하루다. 지금까지 여러 매니저를 거쳤는데, 대니와 함께했던 기간이 가장 짧다. 그러나 지금까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대니 뿐이다.

대니는 우리 팀이 다른 매니저를 찾을 때까지 임시로 맡은 것이었고, 팀 업무에 간여하지 않았다. 나도 대니에게 많은 기대를 하지 않았다. 쓸데 없는 일을 벌여 팀이 일하는 데 방해만 되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대니는 팀 일에 간섭하는 대신 일하는 데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파악하고 해결하려 애썼다.

원래 자신의 팀도 관리해야 했을테니 우리 팀에 신경 쓸 여력이 많지 않았을 것이다. 스탠드업에도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팀원들과 매주 1:1 면담은 빠뜨리지 않았다. 그때 대니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그 시간이 즐거웠고 기다려졌다는 기억은 남아있다.

팀을 떠나기 직전 어떻게 하면 새 팀에서 잘 적응할 수 있을지 조언을 구했다. 그리고 짧은 기간이었지만 당신과 함께 있어 좋았다, 혹시 가끔식 도움말을 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그렇게 말하며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예전에 다른 매니저에게도 비슷한 부탁을 했다가 까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대니도 '그래, 그렇게 하자' 하며 형식적으로 좋게 대답하고는, 나중에 시간 되냐고 물으면 바쁘다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두 번 거절 당하면 나도 실례라 생각해 더 이상 연락하지 못할 것이다. 예전에 다른 매니저가 내게 그런 식으로 대한 적이 있다. 대놓고 거절한 것은 아니지면 씁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마치 '나중에 밥 한 번 먹자'고 막연하게 말하고는 진짜로 연락하면 바쁘니 나중에 하자는 식으로 몇번 미루다 결국 안 만나는 것처럼. 그런데 대니는, '분기에 한 번씩은 어떻겠냐?'고 되묻더니 곧바로 일정표에 등록하고는 내게도 초대장을 보냈다. 물론 나도 바로 초대를 수락했다. 그리고 그 후로 세 달에 한 번씩 화상 회의를 한다.

매니저와 이야기 할 때는 아무리 격의가 없고 친해 보이더라도 조심해야 한다는 걸 배웠다. 다른 매니저와 면담하면서 내가 겪고 있는 개인적 어려움을 이야기했더니 그걸 바로 내 평가에 적용해버려 힘든 시기를 보낸 적이 있었다. 그 후로 매니저와 이야기할 때는 매니저와 회사의 기대치에 맞춰 긍정적인 면만 강조해 이야기를 한다.

대니는 더 이상 내 매니저가 아니기 때문에, 대니와 이야기할 때 그가 나를 어떻게 평가할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대니와 이야기하는 것이 더 마음 편하고 즐거운지도 모르겠다. 특히 현재 팀의 매니저와 뭔가 어렵거나 애매한 일이 있을 때 대니와 이야기하면 많은 도움이 된다.

얼마 전 사내 경력관리 시스템에서 자신의 경력 성장 계획을 생각해보고 매니저와 대화하라는 과제가 할당되었다. 이 주제는 항상 어렵다. 솔직하게 '나는 성장하고 싶은 마음은 크게 없다, 그저 낙지부동에 정년퇴직이 목표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마침 대니와 면담할 날이 되어 대니에게 물어보았다. 대니도 자기 매니저와 그런 대화를 해야 해서 머리가 아프다고 하면서 대답해 주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가 뭘 원하는 지를 아는 것이라고. 사실 내가 뭘 원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했더니 웃으며 대부분이 그렇다고 답한다. 그러면서 몇 가지 예를 들며 설명을 해주었다.

설명을 들으며 나도 떠오른는 생각을 대니에게 말했더니 그것도 아주 좋은 생각이라며 내가 한 말을 좀더 긍정적이고 회사 입장에서 좋아할 만한 말로 다시 표현해 주었다. 그 말을 들으니 반짝 하고 머리에 불이 켜지는 것 같았다. 아, 그걸 그렇게 말할 수도 있구나.

대니와 대화를 나누고 나서 마음이 가벼워 졌다. 같은 말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느낌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었다. 지금 팀 매니저와 어떻게 면담을 풀어나가야 할지 감이 잡혔다.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내가 매니저에게 어떤 요청을 해야 할지도 깨닫게 되었다.

매니저에게 뭔가 요청하는 것, 내가 항상 생각하지 못하는 부분이다. 1:1 면담을 할 때마다 지금 팀 매니저도 항상 뭐 필요한 게 없냐고 물어보는데, 나는 항상 "특별히 필요한 게 없다"고 답한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을 매니저에게 요청할 수 있다는 점을 대니가 상기시켜 주었다.

대니는 이렇게 내가 아무리 바보 같은 질문을 하더라도 항상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 좋은 아이디어를 얻게 해 준다. 의식적으로 상대를 편하게 하려 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고, 그냥 상대가 이야기를 편하게 할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내 고민을 더욱 편하게 이야기 할 수 있다.

대니와의 만남이 특히 도움이 되는 것은, 어떤 과제에 대해 매니저로서 어떤 기대를 하는지 알고 싶을 때다. 현재 팀장에게 이런 요청을 받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매니저 관점에서 당신이라면 어떤 것을 기대하겠는가 같은 질물을 하면 대니는 아주 친절하게 상황을 설명하며 이런 저런 조언을 해준다.

한 번은 바쁠텐데 내게 시간을 내줘서 너무 고맙다고 얘기했더니, 자기도 나와 이야기하는 것이 즐겁고, 도움이 된다는 말을 들으니 기쁘다고 답했다. 그러고는 내게 물었다. "너 혹시 LHR16에 올 일은 없냐? 오면 내가 커피를 사겠다." 말만으로도 정말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