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 1

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나, 마침내 찾아낸, 컴퓨터가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

교통사고 1

집에서 일하고 있는데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둘째 아이를 데리고 집에 오는 길에 오토바이와 충돌했다고 했다. 다행히 가벼운 사고였고 다친 사람은 없다고 했다. 아내는 영어가 서툴어 복잡한 대화를 하지 못한다. 일단 사고 현장 사진을 찍고 연락처를 교환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가 집에 돌아온 후 상황 설명을 듣고 사진을 확인해봤다. 그날따라 원래 다니던 도로에 공사가 있어 차가 많이 밀렸고, 내비게이션이 알려준 우회로로 들어가다가 오토바이와 충돌했다는 것이었다. 우리 차와 상대 오토바이 모두 가벼운 스크래치만 있었다.

이 정도 접촉사고라면 그냥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전 교통사고(불운 4 참조)가 생각났다. 도로에서 앞 차가 후진해 우리 차를 박았는데도 상대가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번엔 우리 잘못도 아닌 것 같은데 상대가 뭘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오토바이 운전자에게 연락이 왔다. 아내 대신 내가 그 자와 대화를 했다. 전화를 하려 했더니 자기도 영어를 잘 못한다며 번역기를 써야 하기 때문에 왓츠앱으로 얘기하자고 했다. 그러고는, 자기는 지금 오토바이 수리 때문에 정비소에 와 있다고 했다.

그러더니 내 자동차 보험 번호를 알려달라, 자기가 내 보험사와 얘기해도 되냐, 아니면 돈을 주겠냐고 물어왔다. 내가 보기엔 우리쪽 잘못이 아닌 것 같다고 얘기하자, 그 자는 무조건 우리 잘못이라며, 자기가 멈춰 있는데 차가 자기에게 와서 충돌했다고 주장했다.

나는 아내에게 들은대로, 차가 멈춘 다음에 오토바이가 와서 충돌했다고 얘기했다. 그 자는 내가 틀리다, 자기가 길에 서 있는데 차가 우회전하며 자기를 보지 못하고 충돌한 것이라고 거듭 주장했다. 그러고는 내가 잘못을 자신에게 덮어씌우려 한다, 내 아내의 부주의로 자기는 죽을뻔 했다는 얘기를 늘어놓았다.

나는 다시, 차는 우회전 하다 오토바이를 보고 바로 멈췄다, 오토바이는 차를 보고도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진입로에서는 어쨌든 속도를 줄였어야 했다, 더군다나 양보선까지 있었다, 차 옆에 공간이 많은데도 피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랬더니 이 자는 자기가 일부러 사고를 냈냐고 하는거냐 내게 따졌다.

그러고는 자기 대시캠으로 찍은 비디오를 보내주었다. 비디오를 봐도 내가 보기엔 오토바이가 잘못한 것으로 보였다. 오토바이가 멈춰 있었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자동차가 진입하는 데 속도를 충분히 줄이지 않았고, 옆에 공간이 많은 데 피하지도 않았다. 피하기 어려울 정도로 차가 갑자기 온 것도 아니었다.

상황을 좀더 자세히 이해하려고 비디로를 다시 재생하려 했는데 파일이 이미 지워졌다. 상대가 왓츠앱으로 비디오를 보내며 한 번 보고 나면 지워지도록 설정해서 보낸 것이었다. 지워지지 않게 다시 보내줄 수 없냐고 했더니, 자기 보험사가 내게 아무것도 보내지 말라고 했단다.

그러면서 자기는 멈춰 있었고 차가 와서 충돌했다는 말을 반복하며, 내게 여전히 보험처리 할 것인지 물어왔다. 이 자는 돈 뜯어내는 게 목적인 것처럼 보였다. 나는 내 관점을 다시 얘기했고 비디오도 내 관점과 일치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보험처리 하겠다고 알려주었다.

내 차에도 대시캠이 있기에 동영상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 오토바이가 차의 우측 뒷 부분에 충돌했기 때문에 대시캠에 나오지 않을 것 같기는 했지만 그래도 자동차가 어떻게 우회전을 하고 있었는지 정도는 확인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SD 카드 인식이 되지 않아 비디오를 확보할 수 없었다.

한동안 잠잠해서 이렇게 지나가사 싶었을 때 우편이 왔다. 오토바이 수리에 관련된 엔지니어 리포트였다. 오토바이 가치가 £1,703인데 수리는 £2,446.39이 청구되었단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보험사에 연락해 물었더니 직접 대응하지 말고 우편을 스캔해 보내달라고 했다.

얼마 후 내 보험사에서도 메일이 왔다.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일단 임시 비용을 지불하지만, 이게 우리쪽 책임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며 책임 소재를 가리는 데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을 거란 설명이 덧붙어 있었다. 그리고 곧 조사관이 우리쪽 진술을 듣기 위해 내게 연락할 것이라 했다.

며칠 후, 조사관이 통역사과 함께 집에 왔다. 조사관은 최근 이와 비슷한 사고가 상당히 많았다, 오토바이 운전자는 모두 남미 출신이었으며, 보험사와 법률대리인은 모두 포르투칼 계 회사로 모종의 커넥션이 있는 것 같다고 일려 주었다. 진술서를 작성하는 데 두 시간 넘게 걸렸다. 이 정도면 금방 끝난 거란다.

그리고 조사관은 절대 현금 합의를 하지 말고 보험사를 통해 사고를 처리하라고 당부했다. 현금을 받고도 나중에 클레임을 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그럴 경우 현금을 줬다는 걸 증명하기 어렵기 때문에 상대에게 현금 보너스만 준 꼴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말을 주면에 널리 공유하라고 했다.

조사관이 사고 사진과 왓츠앱 대화 내역 등을 보내달라고 해서 메일로 보내주었다. 일주일 정도 지났는데 아직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다. 잘 처리되고 있는 것일까? 제발 잘 처리되면 좋겠다. 이 사고 때문에 보험료가 크게 오르지 않기를 간절하게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