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자동차 여행

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나, 마침내 찾아낸, 컴퓨터가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

유럽 자동차 여행

제목은 거창하지만 자동차로 독일에 있는 게제케란 곳을 다녀온 것에 불과하다. 직접 운전해 유럽을 방문한 것은 처음이었고,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는 영국 차로 주행방향이 영국과 반대인 유럽에서 운전한 것도 특별한 경험이었기에 간단히 정리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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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게제케(Geseke)에서 열리는 교회 연례 행사에는 보통 아내와 아이들만 보냈다. 독실한 무신론자인 내가 교회 행사에 참가할 이유도 없고, 집에 혼자 있는 시간도 좋았기 때문이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올해도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생각하며 기대에 들떠 있었다.

작년까지는 교회에서 대절한 버스를 타고 갔는데, 출발 세 시간 전부터 교회에 모여 기다리다가 거의 자정이 되어 출발해 밤새도록 버스를 달려 목적지에 도착하는 빡쎈 일정이었다. 아내는 체력이 워낙 약해서 출발 전부터 이미 진이 다 빠져버리기 때문에 도저히 버스로 갈 엄두가 안 난다는 것이었다.

차를 가지고 가면 아무래도 단체로 이동하는 것보다는 융통성이 있고, 독일에 있는 동안 사용할 온갖 잡동사니를 싣고 갈 수 있어 좋다며 내게 함께 가자고 했다. 엄마의 사주를 받았는지 아이들까지 하도 졸라대는 통에 마지못해 가기로 했다. 아내가 돕긴 하겠지만, 운전은 나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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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 산 지 거의 10년이 되어 가지만 아직 운전해 유럽에 가본 적은 없다. 유럽에서는 오른쪽 차선을 이용해야 하는데, 영국 자동차는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다. 영국에서 영국 차로 운전하거나 유럽에서 유럽 차로 운전하는 것은 크게 걱정되지 않지만, 유럽에서 영국 차로 운전하는 건 헷갈리지 않을까?

예전에 자동차로 유럽을 자주 방문하던 동료에게 차선이 반대로 바뀌면 운전할 때 헷갈리지 않냐고 물었을 때, 특별한 상황에서 약간 불편할 수 있지만 헷갈릴 정도는 아니었다는 답을 들었던 것 같다. 수많은 사람들이 영국에서 유럽으로, 또 유럽에서 영국으로 자동차를 끌고 여행한다. 심각한 문제는 없을 것이다.

구글 맵으로 경로를 확인했다. 집-포크스톤(Folkstone)-유로터널-칼레(Calais)-덩커크(Dunkirk)-겐트(Ghent)-앤트워프(Antwerp)-에센(Essen)-도르트문트(Dortmund)-게제케(Geseke)까지, 편도 700 km에 가까운 긴 여정이다. 7시간 10분에서 8시간 40분 걸린다고 나오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걸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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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로 운전해 유럽을 방문할 때 그냥 차를 끌고 가면 되는 게 아니었다. 준비할 게 많다. 일단 영국은 솅겐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영국-프랑스 국경을 통과하려면 여권이 필수다. 영국으로 다시 입국할 때 문제가 되지 않도록 비자도 확인해야 했다.

자동차 뒷부분과 번호판에 UK 스티커도 붙여야 한다. 유럽에서는 안전삼각대와 반사자켓도 필수로 구비해야 한단다. 이런걸 정말 검사할까 의문이었지만, 이런 것 때문에 외국에서 난처한 상황에 처하고 싶지도 않았고, 어차피 비상상황에 필요한 것이다. 아마존에서 검색해보니 별로 비싸지 않아 바로 주문했다.

프랑스 대도시 방문시 환경세를 내야 한다. 독일 도시 통과시 환경세 납부 스티커도 부착해야 한다. 벨기에 대도시 방문 시 차량 번호를 등록하고 자동차 배출 등급에 따라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일단 독일 환경세를 납부하고, 벨기에는 방문할 도시를 결정한 후 진행하기로 했다.

아내는 돌아오는 길에 여행을 더 하고 싶어 했다. 경제 사정이 좋지 않기에 나는 여행에 너무 많은 비용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미 세 달 연속 마이너스다. 겨우 설득해 돌아오는 길에 브뤼헤(Brugge)만 들리기로 했다. 대도시 보다는 그냥 작은 도시가 나을 것 같았다.

유로터널도 예약해야 한다. 내가 선택한 시간대 요금은 £116. 조금 비싸게 느껴졌지만 그런가보다 했는데, 알고보니 그건 편도 요금. 왕복으로 총 £229가 들었다. 자동차 보험이 유럽에서도 적용되는지 확인하기 위해 보험사에도 연락해야 한다. 다행히 자동차 보험을 갱신하는 데는 £9.80 밖에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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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터널 출발 시간을 오전 9시36분으로 예약했는데, 출발 하루 전 안내 메일이 왔다. 체크인을 출발 1시간 전인 8시36분까지 하라는 것이었다. 뜨아, 이런건 미리 알려줘야지! 생각해보니 여권 검사하고 차를 기차에 싣고 하려면 그 정도 시간을 걸릴 것 같다. 미리 생각하지 못한 내 잘못이다.

그 시간에 도착하려면 집에서 6시 반에 출발해야 하는데, 그렇게 일찍 출발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시간을 바꾸네 마네 옥신각신 하다가 그냥 일찍 출발하기로 했다. 시간을 바꾸려면 £65 정도 추가 비용이 발생한다. 적은 금액이 아니다. 그리고 출발 시간을 늦추면 목적지 도착 시간도 밀린다.

옮길 수 있는 짐을 모두 챙겨서 차에 실어 두었다. 아내와 아이들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옷만 갈아입고 바로 차에 타기로 했다. 나는 새벽 5시쯤 일어나서 샤워하고 아침 먹고 나머지 짐을 차에 실을 것이다.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장거리 운전을 하는 게 약간 부담되긴 했지만, 카페인의 도움을 받으면 괜찮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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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에 6시 반쯤 집에서 출발했다. 포크스톤까지는 두 시간 정도 걸린 것 같다. 유로터널 입구에서 잠깐 헤맸지만, 무사히 지날 수 있었다. 여권 검사와 간단한 보안 검색을 통과했다. 검색요원이 혹시 칼 같은 거 가지고 있냐고 물었을 때 없다고 답했는데, 나중에 보니 사과를 깎기 위한 과도가 있었다.

유로터널 기차에 타는 데 시간이 걸렸다. 차를 몰고 그대로 기차 안으로 들어갔다. 기차가 움직이는 동안 차 안에 그대로 있으면 된다. 차에서 나와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그대로 차 안에서 기다린다. 우리는 차 안에서 아침을 먹었다.

해저 터널이기 때문에 처음 얼마 안 되는 지상 구간을 지나면 밖을 볼 수 없다. 기차 창문이 별로 크지 않기 때문에 지상 구간에서도 바깥 경치가 잘 보이지는 않는다. 조금 지나자 아이들이 심심하다고 투덜거린다. 나도 지루했다. 출발 후 정확히 35분 후에 해협 건너편에 도착했다.

이제 반대편 차선으로 운전해야 한다. 처음에는 약간 긴장했지만, 바로 고속도로로 나와 운전하면서 특별히 불편하지는 않았다. 고속도로 가운데 중앙분리대가 있어 실수로라도 역주행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마지막 짧은 구간을 제외하면 목적지까지 계속 고속도로로 연결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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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부터는 끝없는 평원이 펼쳐졌다. 영국도 잉글랜드에는 산이 거의 없어 약간의 구릉만 있을 뿔 꽤 평평하다고 생각했는데, 프랑스-벨기에-네덜란드-독일을 거치는 이 구간에서는 구릉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지평선을 가리는 건 나무나 건물 뿐이었다.

휴게소 두어 번 들린 것을 제외하고는 계속 달렸다. 앤트워프와 도르트문트 근방에서 차가 많이 밀려 시간이 많이 늘어졌다. 중간에 두어 시간 정도 아내가 운전하는 동안 쉴 수 있었다. 중간 휴식이 큰 도움이 됐는지 목적지까지 힘들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다.

아침 6시 반에 집에서 출발해 저녁 6시 반쯤 목적지에 도착했다. 기차 탄 시간도 있고, 휴게소에서 쉰 시간도 있지만, 도착까지 12시간이 걸린 것이다. 길은 복잡하지 않았다. 거의 직진만 했다. 한 두 곳에서 약간 헷갈리긴 했지만 무사히 올바른 길을 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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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길에 브뤼헤(Brugge)라는 곳에 들렸다. 대도시를 피하고 싶었고, 이동 경로에서 제일 가까워 선택했을 뿐인데, 알고보니 관광도시였다. 우리 가족 말고도 관광객이 많았다. 학교에서 단체 여행을 온 것으로 보이는 그룹, 광장을 가득 메운 인파, 마차를 타고 지나가는 여행객, 운하에서 유람선을 타는 사람들...

우리는 아내가 검색해 놓은 와플 맛집으로 갔다. 와플과 아이스크림 커피를 시켰다. 카페 분위기는 좋았지만 와플 맛은 조금 실망스러웠다. 마켓 광장을 지나 골목으로 들어갔다가 기념품 상점에 들어가더니 나올 생각을 안 한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구경하라 하고 나는 밖으로 나와 주변을 둘러보았다.

떠나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시간이 많았다면 거리를 돌아다니며 구경하고 싶었고, 운하에서 유람선도 타보고 싶었다. 레스토랑에 들어가 홍합 요리도 먹어보고 싶었고, 가게에 들어가 벨기에 수제 초컬릿도 사고 싶었지만, 나중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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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를 지나는 동안 휴게소에서 20리터 정도 주유했다. 그때 기름 가격이 리터당 €1.6 정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따라서 주유 금액은 대략 €32 정도가 되어야 할 터다. 그런데 그 주유소의 키오스크는 조작이 까다로웠다. 제대로 한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아 영수증을 출력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제대로 됐겠지 생각하고 돌아왔는데, 집에 와서 확인해보니 €125가 결제된 것으로 보였다. 으악, 이게 뭐야! 신용카드 해외 사용 수수료를 절약하기 위해, 여행 전에 글로벌 머니 계좌를 만들어 유로화를 넣어 놓고 데빗카드로 결제했는데, 벌써 €125가 빠져나갔다면 돌려받지 못하는 것 아닌가 걱정이 앞섰다.

늦은 밤이었지만, 에라 모르겠다 하고 24시간 상담 전화번호로 은행에 전화했다. 상황을 설명했지만 상담사는 내가 말한 트랜잭션을 볼 수 없다고 한다. 은행 앱을 자세히 보니 오늘 사용한 내역은 모두 Pending 상태로 나왔다. 상담사는 아직 상점에서 청구를 안 한것 같다며 청구된 후에 다시 연락하라고 안내했다.

음... 글로벌머니 데빗카드라 결제하면 통장에서 바로 빠져나가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보다. 이틀 정도 지난 후에 확인해 보니 €32.19가 빠져나간 게 보였다. 주유 전에 카드를 스캔해야 했는데, 아마 최대 금액으로 청구를 한 후에 주유가 끝난 다음 정확한 금액으로 정정하는 시스템이었나 보다.

이렇게 주유 요금 과다 청구 사건은 헤프닝으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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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처음 운전했을 때가 생각난다. 운전석과 주행 방향이 한국과 반대기 때문에 운전할 때마다 신경을 곤두세우곤 했다. 영국 자동차로 유럽에서 운전하는 것은 또 다른 경험이다.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는 자동차를 도로 오른쪽으로 운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직접 경험해보니 처음 걱정했던 것만큼 어렵거나 헷갈리지 않았다. 신경이 곤두서지도 않았다. 중앙 분리대가 없는 도로에서 운전할 때도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마트 주차장에서 나올 때 당당하게 반대편 차선에 서 있었던 것만 빼면 큰 실수도 없었다.

나중에 경제 사정이 조금 나아지면, 차를 타고 여유있는 일정으로 유럽 여러 도시를 방문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