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승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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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촌 동생 다니엘라는 이탈리아 북부 볼차노/보젠(Bolzano/Bozen) 근처에 산다. 이곳은 알프스 자락에 위치해 매우 아름다운 곳이어서 예전부터 한번 가보고 싶었지만, 교통이 불편해 쉽게 갈 수 없었다. 구글 맵에서 찾아보니 항공편이 있을 만한 근처 큰 도시로 밀라노(Milano)와 베네치아(Venezia)가 보였다. 비행기를 타고 가서도 기차를 3~5시간 타야 한다.
팀에 이탈리아에서 온 통료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베로나(Verona)로 해서 가면 시간을 줄일 수 있다고 했다. 다니엘라도 예전부터 한 번 놀러오라고 해서, 이번에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웠다. 런던-베로나 항공편을 알아보는데, 며칠 새 가격이 오르는 것 같아 눈 딱 감고 예약해 버렸다. 갈 때는 프랑크푸르트(Frankfurt)를 경유하고, 올 때는 뮌헨(München)은 경유한다.
베로나에서 볼차노/보젠까지 기차표도 예매했다. 다니엘라가 사는 곳은 정확히 메라노/메란(Merano/Meran)이란 곳으로 볼차노/보젠에서 차 타고 30분 정도 북쪽으로 더 가야 한다. 메라노/메란까지 기차표를 끊는게 낫지 않을까 물었더니, 그냥 볼차노/보젠까지 오면 다니엘라 남편 미히가 우리를 데리러 나올꺼라 했다. 올때는 다니엘라가 베로나 공항까지 태워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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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가 아침 8시30분 출발. 생각해보니 적어도 두 시간 전에 공항에 도착하려면 아침 6시에 집을 나서야 한다. 전날 짐을 모두 싸두고 아침에 일어나 바로 출발하기로 했다. 나는 아침 5시에 일어나 샤워도 하고 커피도 한 잔 마셨다. 5시 반쯤 아내와 아이들을 깨워 나갈 준비를 하고 6시쯤 우버를 불렀다. 차가 출발하고 5분쯤 지났을까, 글로벌 머니 카드를 챙기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에휴...
공항에는 6시50분쯤 도착했다. 아내가 환전하라고 재촉해 환전소 ATM기에서 환전했다. 환전하고 나서 확인해보니 환율이 장난아니다. 인터넷으로 확인해보니 1 GBP = 1.19 EUR 였는데, 이 ATM기 환율은 1 GBP = 0.89 EUR. 300 유로 환전하는데 80 파운드 더 지불했다. 역시 공항에서는 환전하는 게 아니란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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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프푸르트 행 비행기가 44분 지연되었다. 다음 비행기 환승 시간이 1시간 15분임을 감안하면 이미 일정이 꼬인 것이지만, 지난 번 한국 갔을 때의 환승 경험을 떠올리며 희망을 가졌다. 서두르면 제시간에 갈아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비행기가 속도를 높여 좀더 빨리 도착할 수도 있다, 다음 비행기 역시 지연될지도 모른다... 희망 회로를 돌렸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은 내 희망을 처참하게 뭉개버렸다. 다음 비행기 탑승구를 찾기도 쉽지 않았고, 엄청 멀리 떨어져 있었다. 보안검색과 출입국 심사를 모두 거쳐야 했는데, 그 와중에 우리 앞으로 새치기 한 인간 때문에 출입국 심사에 5분도 넘게 지연된 것 같다. 걷는 듯 뛰는 듯 겨우 도착했을 때 탑승구는 이미 닫혀있었다. 베로나 행 비행기는 출발 시간을 정확히 지킨 것이다.
항공사 직원에게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어보니 다음 베로나 행 비행기는 밤 9시 넘어서 있다고 한다. 그때까지 기다리기도 힘들거니와 그때 베로나로 간다고 한들 한밤중에네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건 분명 즐거운 경험은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도 빨리 최종 목적지에 도착하고 싶었다. 항공사 직원이 루프트한자 고객센터에 가서 상담해보라고 했다.
고객센터 직원들은 상당히 친절했다. 볼차노/보젠으로 가기 편한 여러 목적지를 알아보았다. 인스부르크, 베네치아, 볼로냐 등등... 볼로냐는 너무 멀었고, 베네치아, 인스부르크는 시간이 맞는 항공편이 없었던 것 같다. 인스부르크가 볼차노/보젠과는 제일 가깝게 보여 살짝 기대했지만, 밀라노 말펜자(Malpensa)로 가게 되었다.
고객센터 직원이 어떻게 가족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가는지, 거기서 밀라노 행 비행기를 타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밀라노 행 티켓을 받고 가족을 데리러 가는데, 보안검색대를 또 통과해야 했다. 아니, 아까 이쪽으로 올 때는 보안검색대가 없었는데... 다음부터 프랑크푸르트에서 환승하는 건 피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밀라노에서 볼차노/보젠으로 가는 기차를 예매해야 하나 생각했지만,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 한참을 걸어 밀라노 행 비행기 탑승구에 도착했다.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탑승이 시작되지 않았다. 40분 정도 지연되는 것을 보고 기차표를 예매하지 않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예매했다면 또 제 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지 안절부절 했을 것이다. 그냥 밀라노에서 기차표를 사는 게 마음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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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가 밀라노 말펜자 공항에 착륙했을 때 5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공항을 나와 기차역으로 갔다. 기차역은 공항에 바로 붙어있었다. 역 창구에 가서 볼차노/보젠 행 기차표를 구매했다. 일단 밀라노 시내로 가서 기차를 갈아타고 베로나로 간 다음 다시 볼차노/보젠 행으로 기차를 갈아타야 한다. 역무원이 에스컬레이터 타고 내려가 플랫폼 2에서 기차를 타면 된다고 알려주었다.
역무원 설명대로 플랫폼2에서 기타를 탔는데, 이게 어디서 내려야 하는 건지 명확하지 않았다. 마침내 종점에 가까워졌을 때 아무나 붙잡고 물어봤다. 그 사람 말이, 우리는 밀라노 중앙역으로 가야 하는데, 이 기차는 밀라노 카도나(Cadorna)역으로 가는 것이라 했다. 다시 식은 땀이 나기 시작했다. 역무원은 중앙역으로 가는 기차를 타야 한다고 따로 설명하지 않았다.
그 사람 말이, 원래는 카도나 역에서 중앙역으로 지하철이 있는데, 지금은 공사중이라 이용할 수 없다고 했다. 중앙역으로 가려면 이 지하철을 타고 어디로 가서 다른 지하철로 갈아타야 한다고 설명을 하는데, 그대로 찾아갈 자신이 없었다. 그 분은 친절하게도 우리를 카도나 역 고객센터로 데려다 주었지만, 고객 센터 설명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냥 택시를 타기로 했다. 다행히 거리는 멀지 않았고, 베로나 행 기차 출발 시간 전에 밀라노 중앙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요금은 14유로 정도 나왔다. 아마 지하철을 탔어도 4명 요금 합하면 10유로 넘게 나왔을 것이다, 고생 안하고 편하게 왔다, 생각하기로 했다. 근처 식당에서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베로나 행 기차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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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에서 베로나까지는 두 시간 조금 못 되게 걸렸다. 베로나에 예정보다 조금 빠른 밤 9시 15분쯤 도착했지만, 다음 기차를 기다리는 시간만 조금 늘어났을 뿐 별 도움은 안 됐다. 40분을 기다려 볼차노/보젠 행 기차를 탔다. 밤 11시 30분쯤 마침내 볼차노/보젠 역에 도착했다. 다니엘라 남편 미히가 역에 나와 있었다. 한국으로 신혼여행 왔을 때 만나고 17년만에 처음 다시 보는 것이었다.
미히 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집에서 나온 지 19시간도 넘게 걸려 마침내 다니엘라 집에 도착했다. 다니엘라는 아이들과 함께 자고 있다고 했다. 이 가족은 원래 9시면 잠자리에 들지만, 미히는 우리 때문에 늦게까지 기다린 것이었다. 다니엘라 집은 런던의 우리집과는 비교도 안 될만큼 컸고, 게스트 룸이 따로 있었다. 늦은 시간을 고려해 다음날 9시쯤 만나기로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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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서 항공사에 클레임을 제기했지만 기각되었다. 내 생각에는 항공 지연으로 연결편을 놓쳤고 그로 인해 기차표도 날렸으니, 밀라노-볼차노/보젠 기차표 비용은 보상해줘야 할 것 같은데, 항공사는 비정상적 상황에 따라 항공편이 지연되었기 때문에 보상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정상 상황이었다면 비행기가 지연되지 않았겠지.
지난 번 한국에 다녀올 때도 바르샤바를 경유해 갔었다. 그때도 첫 비행기가 지연되어 엄청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무사히 연결편을 탈 수 있었다. 이번에는 지난 번처럼 운이 좋지 않았다. 비행기를 놓쳐서 최종 목적지에 도착하는 데 계획보다 6시간 지연 되었고, 예매해둔 기차표를 날리고 새로 기차표를 사야 해 추가 비용이 발생했으며, 다음 날 일정도 헝클어졌다.
그리고, 런던에서 베로나 가는 비행기를 검색해보니 직항도 꽤 보인다. 아니, 내가 비행기표를 예약할 때는 직항이 없었는데... 어쩌면 항공편을 검색할 때 출발지를 런던 히드로 공항으로 제한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개트윅(Gatwick) 공항에서는 베로나로 가는 직행이 꽤 있다. 베로나 직항으로 예약했더라면 이 모든 삽질이 없었을 것 아닌가.